장 성 구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이사장

경희대학교 명예교수/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축복 받는 날이 되어야 하고, 기다려지는 날이 되었어야 합당한 일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자괴감에 빠지는 서글픈 날이 매년 5월이면 찾아온다. 40년 가까이 대학 강단에 섰다가 퇴직한 사람으로서 수치스럽기까지 한 날로 변한 ‘스승의 날’을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처참한 날로 변모되기 까지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분위기의 변곡점도 있었지만 스승이라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품격에 맞지 않는 일탈된 행위가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

나라에는 국경일도 많고 기념일도 많다. 그 중에서도 숱한 수난 속에 만신창이가 된 기념일을 찾는다면 바로 ‘스승의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혁명 이후인 1963년 5월 26일을 교권 존중과 스승 공경의 사회적 풍토를 조성하여 교원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 시겠다는 훌륭한 목표를 갖고, 청소년 적십자 중앙학생 협의회 기념일을 선택하여 스승의 날로 제정 하였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던 사람으로서 되돌아 생각해 보면, 국경일 마다 면(面)의 유지 분들과 면내의 여러 내빈들(주로 학부형)이 둘러선 가운데 800여명의 전교생이 모여서 국경일의 기념행사를 거행하였다. 단상에는 면장님, 지서장님, 의용소방대장님 그리고 우리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앉아 계셨다. 그런데 모든 행사를 주관하고 축사를 연설하는 분들은 면장님이나 지서장님이셨고, 때로는 군청에서 나오신 분이 주도하셨다. 우리들의 우상이신 교장 선생님은 단상의 어느 한쪽 끝 의자에 조용히 앉아 계셨다. 그러다 어떤 운이 좋은 기념식 날에는 행사의 마지막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만세삼창을 교장 선생님께서 주도 하셨다. 교장 선생님께서 호령하듯 큰 목소리로 ‘대한민국 만세’를 선창하시면 우리들은 두 팔을 높이 들어 대한민국 만세를 큰 소리로 세 번 외쳤다. 그것은 엄청 자랑스럽고 가슴이 뭉클한 일이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께서 만세를 선창하시는 기념식은 정말 드물게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하였다.

그러나 군사혁명 이후 세상이 바뀌어 스승의 날이 기념일로 제정된 이후에는 기념식장의 모습이 상전벽해가 되었다. 큰 행사 때면 우리들의 무서운 교장 선생님께서 그 지역의 최고 어른으로서 단상의 중앙 상석에 품위 있게 앉아계셨고 행사의 모든 일을 주관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자랑스러운 교장 선생님 때문에 공연히 목에 힘을 주고 어깨를 흔들고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스승의 날은 날짜를 정하는 일 뿐만 아니라 존폐의 부침 속에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1965년부터는 5월 25일이던 스승의 날을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5월 15일로 다시 정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날이 지정된 지 8년만인 1973년 서정쇄신을 목적으로 폐지되었고 또 다시 9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1982년 부활 되어 오늘에 이르는 질곡의 역사를 갖고 있다. 스승의 날이 폐지된 이유가 서정쇄신이었다는 점에서 교단에 섰던 사람으로서 그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다.

유신정권의 출범 직후인 1973년, 정부는 이반(離叛)된 민심을 수습하여야 하는 때였다. 정권은 국민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국민들이 납득하고 호응할 수 있는 국정쇄신을 과제로 선정하여 강력히 추진함으로서 정권의 참신성을 보여 주어야만 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숭고한 의미를 갖고자 제정된 기념일이 서정쇄신의 대상이 되어 폐지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동안 스승의 날을 빙자하여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유추가 맞는다면 1982년에 스승의 날을 부활시킨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아마 군사정권의 유화정책 중의 하나로 되살아 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글 쓰는 사람의 단순하고 개인적인 추측일 뿐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말이다.

현직에 있을 때부터 매년 5월이 오면 심대한 우울증에 빠졌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라는 긴 이름의 법이 제정된 다음부터 스승의 날은 선생님들에게는 공포의 날이 되었고, 소위 파파라치들에게는 사진을 찍어 돈을 벌 수 있는 감시의 날로 변하였다. 매년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여러 학교에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안내문이 배달되었다. 어설픈 행동을 했다가는 패가망신을 당할 우려가 있고 파파라치들이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아예 당일에 휴무하고 문을 닫는 학교까지도 생겨났다. 급기야는 어떤 못된 학생이 미워하는 선생님께 간단한 선물을 드리고 이것을 받은 선생을 고발하는 상상할 수 없는 일까지 생겨났다.

‘스승의 날’이라는 본래의 품격과는 전혀 거리가 뭔, 불결하고 부정 탄 날로 전락한 것이다.
전국의 각종 학교의 교단에 서있는 선생님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감시의 대상인 예비 범법자로 전락한 것이다. 이쯤 되면 기념일로서의 가치는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단에 섰던 사람들에게는 잊고 싶은 치욕을 회상하여 기억나게 하는 날이 된 것이다.

스승이나 선생님에 대한 시대적 가치도 많이 변하였다. 존중과 공경을 받는 선생님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단순히 돈 받고 가르치는 사람으로 치부되는 세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승의 날이라는 기념일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날을 유지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 한다. 오히려 스승이라는 위치에 있는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협박과 위협을 가하는 날이 되었다.

철없는 제자들이 한 송이 꽃이나, 커피라도 한 잔 사들고 오는 일이 벌어지면 큰 낭패다. 두려운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 봐야 한다. 제자들을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치욕과 공포의 날이고, 정작 학생들과 국민들 사이에서는 완전히 잊혀진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의 날은 폐지하고, 그 대신 우리민족의 영원한 대 스승이신 세종대왕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5월 15일을 세종대왕 탄신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여 후학과 제자들에게 표상이 되는 참 스승을 기리는 날로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게 되면 스승의 날을 제정했던 기본 정신에도 부합되고, 매년 이 날만 되면 자존심에 먹칠을 하는, 스승이라는 위치에 서있는 사람들의 구겨진 체면도 되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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