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보사 30주년 창간특집]

엄중식
가천의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
대한의료관련감염관리학회 정책이사

[의학신문·일간보사] 임상의가 국가 방역체계를 논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우리나라를 위협한 신종 감염병이 5~6년 주기로 찾아오는 순간마다 감염병의 현장에 서 있었기에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년간 우리나라의 경제적 성장과 의료 수준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감염병에 대한 대응 능력은 다른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 몇 가지 고언을 드려 본다.

질병본부 ‘질병관리청’으로 승격

2003년 사스의 위협에 직면하여 대응하는 과정에서 ‘질병관리본부’가 창설되었다. 현재 방역 체계와 법령에 의하면 질병관리본부는 감염병 방역의 핵심 기관이다. 2015년 메르스 국내 유행 이후 차관급 수장이 이끄는 조직이 되었지만, 고도화된 전문가 조직이라기보다 여전히 행정조직에 가까운 형태이고, 지금도 본부장을 비롯한 일부 간부의 역량으로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제 수준과 인구 규모를 가진 국가에서 질병관리본부와 같은 방역 핵심 기관에 어느 정도의 인력과 예산을 배정하는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인구 1500만명의 중국 텐진시 질병관리본부의 인력 수준이 우리와 비슷한 규모이고, 미국 CDC(질병통제예방센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은 인원과 예산을 배정받고 있다.

행정과 전문적인 업무의 구분이 없어서 전문가가 행정업무 처리로 업무 집중력이 감소하고, 지방 조직이 없어서 지방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충분한 지원을 못하거나 현장 장악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역학조사관의 부족은 더 말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해마다 새롭게 계약을 해야 하는 계약직인데다가 의사 출신이 지원하기에는 보수나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보장도 없다보니 좋은 인적 자원을 선발할 수 없다.

세계보건기구는 인구 20만명 당 한 명의 역학조사관을 권고하고 있으나 우리는 이 기준에 1/3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질병관리본부를 질병관리청으로 승격시켜서 독립적인 인사권과 예산권을 가지고 방역의 중심으로서 더 성장시킬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신종 감염병의 방역은 물론이고 다양한 질환의 감시와 관리의 주체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아야 코로나19와 같은 위협적인 감염병 유행에 대응이 가능하다.

복지부와 지자체 대응역량 강화

질병관리본부가 코로나19 유행 초기부터 비교적 대응을 잘하고 있는 것과 달리 질병관리본부의 결정을 실행 가능하도록 지원해야 하는 보건복지부의 경우 거의 훈련이 안 되어 있으며, 광역지자체는 신종 감염병 대응 역량이 사실상 전무하다. 대구시의 초기 상황에 대한 전언을 들어보면 중앙사고수습본부와 대구시의 갈등과 대립이 위험한 수준이었고, 혼란이 이어지며 피해는 고스란히 대구시민의 것이 되었다. 현장으로 파견을 나간 보건복지부 공무원은 질병관리본부의 전략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고, 지자체는 신종 감염병에 대한 자체 역량을 검토하거나 계획해 본 적이 없다.

신종 감염병과 같은 특별한 재난 상황에서 질병관리본부와 보건복지부가 어떻게 역할을 나눌 것인지 결정하고 이를 근거로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보건소를 중심으로 지자체의 신종 감염병에 대한 역량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하며, 지자체 소속 역학조사관을 법령에서 정한 대로 채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서로 다른 의견이거나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 의사 결정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체계도 반드시 필요하다.

감염병 전문병원의 설립

2015년 메르스 국내 유행 이후 신종 감염병 대응을 위하여 중앙 감염병 전문병원과 권역 병원을 세우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논의는 2년 동안의 용역연구사업으로 끝났고, 이후 예산 확보에 실패하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코로나19 유행 과정에서 감염병 전문 병원을 설립하지 못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룬 것으로 본다.

중증 환자가 증가하는데 광역지방자지단체에서 병상 확보가 안 되어 사망자가 속출하였다. 환자 분류와 병상 배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중증 환자가 음압격리실에서 적극적인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발생하였고, 장거리 전원을 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 이번 코로나19 유행에서 감염병 전문병원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다시 논의를 시작하였는데 일부 지역에만 설립하는 안이 나와 실망을 시키더니 국회예산정책처가 난색을 보이는 형국이 발생하였다. 코로나19의 대구경북 유행과 그 동안의 경제 손실을 보고도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순히 병원 몇 개를 짓는 것이 아니다. 감염병 전문병원은 평상 시 감염병과 관련하여 의료인을 교육 훈련시키고 다양한 시나리오 개발과 대응훈련을 주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대량 환자가 발생하였을 때 현장에서 정확히 환자 분류를 하고, 적절히 병상 배정을 하며 민간 병원과의 상호 협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만들어 가는데 중심이 되어야 한다.

위기 소통과 자원 관리

마스크 대란은 위기 소통과 자원 관리의 실패였다. 유행 단계에 따라서 마스크 착용의 유효성과 필요성을 차분히 설명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해야 했으며, 반드시 필요한 곳에 마스크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관리를 했어야 한다. 그러나 유행 초기 마스크 착용의 낮은 유효성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행이 진행한 후에는 공정한 공급이라는 명목으로 마스크가 필요한 의료기관에서 구매가 불가능해지며, 정부 지원도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식약처는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마스크 재활용 방안을 마스크 사용 권고안에 넣어 돌이키기 어려운 실수를 하고 말았다.

신종 감염병의 유행은 원인 미생물뿐만 아니라 공포, 혐오, 차별, 거짓말(가짜뉴스) 등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솔직하게 소통해야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다. 한편, 국가비축물자에 대한 연구가 2016년부터 2년 간격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연구의 결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으며, 비축물자 대상 범위를 확장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고 비축물자의 원활한 공급체계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

의료기관의 질 향상

메르스 국내 유행은 병원 내 그리고 병원간 전파로 일어났다. 코로나19의 경우 지역사회감염 유행으로 발생하였지만 의료기관(병원)으로의 유입과 유행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의료기관에 코로나19 감염이 발생하여 유행하면 병원을 방문하였거나 입원 중인 고위험군의 감염 발생이 일어날 수 있고 이는 사망률 증가로 이어진다. 또한 감염되었거나 밀접 접촉한 의료진의 격리로 인하여 의료 공백이 발생하고, 이로 인하여 기존의 다른 중증 환자가 제대로 진료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거의 모든 병원이 다인실 중심의 병실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도록 건강보험급여체계가 이루어져있다. 또한 적은 의료인이 많은 환자를 짧은 시간 동안 보도록 의료체계가 설계되어 있다. 신종감염병은 마치 지능이 있는 생명체처럼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약점을 파고든다. 메르스 국내 유행 당시 초대형 상급종합병원의 응급실에서 장기간 입원 대기 중인 환자를 통하여 슈퍼전파상황이 발생하였고, 대부분의 병원이 제대로 시설을 갖춘 음압격리병실이 없어서 확진 환자 진료와 전파 차단에 애를 먹었다.

코로나19도 여러 병원의 응급의료체계를 중단시켰고, 병동이나 병원의 폐쇄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유행을 계기로 열성 호흡기 질환 환자의 진료체계를 독립적으로 구축하는 방안과 병원의 병실 구조를 다인실에서 1-2인실 중심으로 개선하고, 의료인 1명당 환자 수도 더 엄격한 기준으로 변경하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신종 감염병의 유행으로 사회나 국가의 운명이 바뀐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신종 감염병의 유행은 위협적이다. 지금은 좌고우면할 때가 아니다. 언제 다시 우리를 위협할지 모르는 신종 감염병에 대한 대응체계 개편을 제대로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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