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보사 30주년 창간특집]

한희철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이사장

[의학신문·일간보사] 의학연구란 무엇인가? 우선 의료계에 통용되는 “의(醫, medicine)는 의학(science, 醫學)과 의료(art, 醫療)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라는 개념에서 보면, 의학은 일반적으로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행위인 의료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의료의 개념 속에 의학이 파묻혀 있어 마치 의료의 발전이 의학의 발전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우리나라 의료의 수준이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말이 의학의 수준이 최고수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의료를 위한 의학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의학은 의료를 행함에 있어 과학적인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근거중심의학(EBM)의 개념을 탄생시켰으며, 이를 토대로 현대의료가 더욱 발전한 덕분에 우리는 이제 건강100세시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오로지 전 세계 의학연구자들이 불철주야 노력하여 얻어낸 소중한 열매의 덕분이다. 즉 의학의 발전에 따른 의료의 발전이 이루어낸 결과이다.

최근 발생한 코로나19 사태를 보면 의학의 역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새로운 병원체이며, 이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감염병이 발생하니 의료계에서는 치료의 방향을 잡을 수가 없으며, 결국 적절한 의료가 이루어질 수 없어 전 세계적으로 감염병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현재의 의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진단하고 코로나19 감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백신개발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발전한 의학의 덕분이며, 곧 치료제가 개발될 것으로 확신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의학적 지식이 없는 의료가 있을 수 없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학문적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업적에 대하여는 국제적인 상이 주어지며, 의학분야의 경우는 ‘노벨생리의학상’이 최고의 상으로 알려져 있다. 노벨생리의학상의 수상내용을 살펴보면 현재까지 의학의 흐름을 바꾼 훌륭한 연구들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해마다 수상하는 노벨상의 수상자 선정시기가 되면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항상 ‘왜 우리나라에서는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가 없느냐’는 질문을 반복하며 온 사회가 의학연구에 대한 논란으로 홍역을 겪는다. 해마다 이럴 때가 되면 의학연구현장에 있으면서 매우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현재까지의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총 218명 중 미국 103명, 영국 32명, 일본의 경우 5명 등이며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노벨생리의학상의 수상자 수는 세계의학계에서 연구수준에 비례하는데 주요 수상국들은 의학연구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고 지원체계도 잘 갖추어져 있어 결국 노벨생리의학상은 좋은 연구환경속에서 탄생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의학연구 활성화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나라 의학연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가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예전에 비해 분명히 지금 의학연구의 환경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의학의 기초적 연구에 대한 환경도 좋아졌지만, 특히 연구중심병원사업을 통하여 임상의학자들의 연구를 증진시키려는 정부의 노력 등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부족함이 느껴지며, 의학연구의 체계적 시스템이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한국 의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로 정부가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보건의료의 가장 기본적인 법률인 보건의료기본법에 의하면 제3장에 보건의료발전계획의 수립 및 시행에 대하여 매 5년마다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수립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천문학적인 보건의료예산을 사용하면서 국민의 건강을 수호하기 위하여 보건의료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에 대하여 매 5년마다 계획을 수립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2001년에 수립된 보건의료기본법 제정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세우지 못하였다. 즉 지난 20년간 제1차 보건의료발전계획이 세워지지 않은 채로 한국의 의료는 유지되어 온 것이다. 계획이 없다보니 정책의 안정성은 보장되지 못하였으며, 이로 인한 혼란을 계속 단기처방으로 메워 온 것이니 그 정책의 효율은커녕 방향성도 없이 표류하듯이 흘러올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의 대표적 문제점으로는 민간의료기관의 강제 건강보험 적용 기관화, 공공병원 확충없는 전국민 건강보험제도, 저수가-저부담-저급여의 구조(3저 시스템), 3저 시스템이 낳은 의료기관의 왜곡된 행위를 들 수 있는데, 이러한 환경에서 대학병원은 생존을 위한 경쟁에 휘말리며 본연의 업무인 의학의 발전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의학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정부에 의해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 졌으며, 여기에 더하여 의료계 특히 대학과 대학병원이 이러한 문제점을 부각시키지 못하면서 빚어진 사태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정부와 의료계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 더하여 최근 시행되고 있는 정부의 건강보장성 강화정책으로 인한 환자쏠림현상으로 인하여 대학병원은 거의 마비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교수들은 과다한 진료업무에 시달리며 탈진(번아웃)되어 본연의 업무인 의학연구에는 매진하기 힘든 환경에 놓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학의 발전은 뒷전으로 밀리고 쉽사리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는 것이라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의학의 발전을 더 이상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정부가 모른다면 의료계라도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고민하여야 한다.

둘째로 의학연구에 대한 사령탑(컨트롤타워)이 없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의학연구를 선도하는 미국의 경우 NIH(미국국립보건원)가 의학연구의 사령탑으로 존재하며, 2019년 348억달러(약 41조7600억원)의 예산을 가지고 △공중보건 현안 연구 △기초연구 △중개 및 임상연구 △의과학연구자 육성 등 네 가지 사업을 중점적으로 시행하였다. 유럽 선진국들도 유사한 형태의 기관들이 의학연구를 총괄하는 사령탑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에도 2015년에 3개 부처의 의학연구 R&D를 총괄하는 AMED(일본의료연구개발기구)를 신설하여 의학연구의 효율성을 높여 나가고 있다.

한편 한국의 의학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보건복지부, 교육부 등 여러 부처에서 다루고 있으며, 미국과는 달리 보건복지부가 의학연구의 중심에 있지 못하여 체계적인 의학연구의 인프라가 실질적으로 구축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다 보니 각 부처별로 의학 관련 연구비를 공모하고 있어 실제 의학분야에서 바라볼 때 그 연구들의 효율성이 떨어지며, 또한 연구를 기획하고 진행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의학연구 컨트롤타워 구성해야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의학연구의 사령탑을 구성하여 의학연구의 환경을 개선하고 연구의 효율을 높여가기 위한 노력을 의학계가 중심이 되어 시작하여야 하며, 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의학연구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함께 풀어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로 학술의학(AM, academic medicine) 시스템을 추구함으로써 의학연구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의(醫, medicine)는 의학(science, 醫學)과 의료(art, 醫療)의 성격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현대의학은 의학의 측면을 중시함으로써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왔다. 그러나 각별히 의학의 발전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기존에 밝혀진 의학적 지식만을 이용한 의료에 안주하기 쉽다. 즉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희망을 창출하기 위해 의학교육, 의학연구 그리고 최상의 진료를 위해 지속적으로 의학의 발전을 추구하는 시스템을 학술의학이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의학을 선도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에는 의학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하고 이를 옹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의과대학, 학회 그리고 수련병원들이 연합체를 형성하여 한목소리를 내면서 정부와 긴밀하게 소통하며 세계 최고의 학술의학을 추구하여 왔다. 학술의학은 의학교육, 의학연구와 최상의 진료의 세 가지 목표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 세 가지가 함께 잘 어우러져야 유지될 수 있다.

최상의 의료를 구현하기 위한 의학연구의 핵심은 대학, 대학병원 그리고 학회에 있으며, 이처럼 학술의학을 수호하는 의사들을 학술의학직업경로(academic medicine career path)에 있다고 하여 진료를 위주로 하는 일반 진료의사와 분명하게 그 역할을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의학의 발전은 학술의학직업경로에 속한 대학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야 한다. 비록 그동안 비정상적 의료보험환경 속에서 대학병원이 생존경쟁에 내몰려 왔지만 이제라도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환경을 보다 적극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최근 들어 학술의학의 중심단체들인 의과대학을 대표하는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수련병원을 대표하는 대한수련병원협의회와 학회들을 대표하는 대한의학회가 합동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국의학의 발전을 위해 한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바라건대 보건의료발전계획이 수립되고, 의학연구의 사령탑이 만들어지며, 그리고 학술의학시스템이 구축된다면 의학연구에 있어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주제에 관심있는 의학연구자 뿐만 아니라 의생명과학연구자, 의공학연구자 등 의욕있는 모든 연구자들의 노력이 집중되어 가시적인 연구결과를 생산하는데 있어서 그 효율성이 매우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우리나라 의학연구의 목표를 드높이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들이 우리나라 의학연구의 환경을 대폭 개선함으로써 머지않은 날 그 결실이 맺어져 노벨생리의학상도 수상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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