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보사 30주년 창간특집]
[의학신문·일간보사] 우리나라는 의료전달체계가 사실상 없다. 의료전달체계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의료 필요도와 지역에 따른 의료기관의 수요와 분포에 대한 청사진이 먼저 있고, 그 필요도에 따라 의료법과 관련 법령으로 규정되어야만 제대로 확립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 도입과 함께 행정구역에 따른 진료권을 설정하고, 1차·2차·3차 의료기관간의 기능분담을 시도한 바가 있다. 그러나 1998년 지역간 공급 불균형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규제개혁 차원에서 진료권의 개념이 폐지되면서, 의료법상의 의료전달체계에 관한 근거가 없어진 상태다. 현재는 국민건강보험법에 근간을 둔 요양급여 이용절차로 상급종합병원을 제외한 1단계 요양급여와 상급종합병원(2단계) 요양급여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전부다.
요양급여의 절차에 의해 전달체계를 구분한다는 의미는 환자가 지불하는 진료비용에 의해 전달체계가 결정되는 수가 중심의 체계를 의미하며, 이는 곧 필요도가 아닌 소비자 중심의 체계를 의미한다. 소비자 중심의 체계라고 하니 얼핏 좋은 것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완전한 시장체제의 도입이 불가능한 의료의 특성상 건강보험제도에 의해 수시로 정책적 개입이 이루어지고 더러 정치적 이유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기 때문에 올바른 의료전달체계의 확립이 쉽지 않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1차·2차·3차 의료기관이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될지, 그리고 인구대비 지역마다 필요한 1차·2차·3차 의료기관 병상 자원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청사진도 제대로 없는 가운데 상급종합병원 위주로 수혜가 돌아가도록 보장성 강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지난 2년간 상급종합병원은 밀려드는 환자에 치여 비명을 지르고 지방의 의료기관들은 환자가 없고 탄식을 하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그 사이에 반드시 치료받아야 할 환자가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가 다양하다.
그동안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잇따르면서 정부는 상급종합병원을 중환자 중심 진료기관으로 개편하기 위한 의료전달체계 개선 단기대책을 2019년 9월 4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정부가 발표한 대책안의 주요 골자는 ‘대형병원의 경증환자를 줄여 나가고 중증환자 진료를 늘리도록 상급종합병원 지정기준과 수가를 개편하며, 상급종합병원 명칭을 중증종합병원으로 변경하고, 의사 판단에 따른 의뢰ㆍ회송으로 전달체계를 전환하고, 종이의뢰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는 것이다.
정부의 발표 이후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즉시 의협 산하 ‘의료전달체계 개선 단기대책 TF’(이하 의협단기TF)를 구성하여 대응하였다. 의협은 상급종합병원의 진료를 원하는 경증환자를 줄여가는 목적과 취지는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세부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부작용이 예상되고, 의료 현장과의 괴리도 나타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신중한 접근을 할 것을 지적한 바가 있다.
의협단기TF에서는 의료전달체계의 확립을 위해 수직 및 수평 의료전달체계를 도입하는 방안으로 진료의뢰서 발급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의원급 의료기관의 핵심 진료기능 강화를 대원칙으로 두고, 의원과 일정 소규모 병원급 의료기관간에는 사전 진료의뢰서 작성 의무는 없지만 진료의뢰서를 작성하여 제공할 경우 의뢰서 비용을 지급하도록 하였고, 현재 시행중인 상급종합병원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어느 정도 거점병원의 역할을 하는 대형종합병원까지는 반드시 사전 진료의뢰서를 작성하고 진료의뢰서 작성 후 타 기관에 접수된 경우만 의뢰서 비용을 지급하도록 권고했다.
이러한 수직 및 수평 전달체계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방안으로 환자가 일정 조건 이상의 종합병원에서 사전 진료의뢰서 없이 진료를 받을 경우 진찰료, 처치료, 수술료, 약제비 등 전체 진료비에 건강보험 수가 적용을 제외하는 등 페널티를 부여하도록 했으며, 진료 의뢰를 받은 기관에서는 반드시 회송소견서를 작성하여 의뢰한 기관으로 보내도록 의무화 했다. 이뿐만 아니라, 단기대책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세부제안을 하였으며, 실제 단기대책을 현장에서 적용하면서 발생되는 문제점을 개선하고, 의료전달체계와 관련한 지속적인 논의를 위해 전달체계협의체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논의되고 있는 정부의 전달체계 개선안을 보면, 상급종합병원의 진료 억제 정책으로 국한 되어있어서 현재 일부 지역에서 실질적 상급종합병원의 역할을 하는 대형2차종합병원으로 환자가 쏠리는 풍선효과가 유발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의원간의 진료의뢰활성화에 대한 논의는 진척이 없어 1차 의료 활성화에 대한 정부의 의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의료전달체계 단기 논의사항 아니다
그런데 아직 단기대책도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정부는 중장기 의료전달체계 개선 논의를 강하게 밀어붙여서 현재 7차 회의를 마친 상태이다. 그러나 중장기 전달체계 논의는 단기간에 끝낼 수도 없고 끝내서도 안된다. 우리보다 먼저 인구고령화를 경험한 일본의 경우 의료전달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의료법의 전달체계 관련 내용이 무려 54개조에 이른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의료법 등 타 법령에 의료전달체계에 관한 확고한 근거가 없는 가운데 건강보험법에 의거한 진료비 통제나 억제 정책만으로 전달체계를 확립하려 한다면 환자의 반발과 불가항력의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환자가 1차 의료기관 의사를 대상으로 진료의뢰 시의(時宜) 적정성 여부를 두고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등 다양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장기 대책은 우선 단기대책을 시행해 보고 나타나는 부작용이나 문제점을 살펴보면서 좀 더 세밀한 논의를 거쳐 확립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다.
가장 바람직한 의료전달체계란 환자의 의료 필요도에 맞는 적절한 의료의 제공이 이루어지는 의료전달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의원급 의료기관에서 치료 가능한 질환은 의원급에서, 2차병원급에서 치료 가능한 질환은 2차병원급에서, 상급종합병원에서 가능한 질환의 치료는 역시 상급종합병원에서 치료를 시행하고, 환자들은 적절한 의료를 빠르게 제공 받으면 된다. 이 문제가 간단한 문제 같지만 현장에서는 몹시 어려운 문제이다. 이유는 의료의 공급자와 수요자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만족할 만한 방법을 찾아내기가 참으로 쉽지 않다.
가장 바람직한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해 고려해야할 사항 중 첫 번째가 의료자원이다. 우리나라는 개원의 중에서 전문의가 95%에 달하는 나라이다.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여 의료전달체계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의료기관 종별시스템이다. 인구고령화로 인해 치료보다 케어가 점차 보건의료체계의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현 시점에 1차·2차·3차 의료기관처럼 병원 규모로 위주로 나누는 종별시스템만 가지고는 효율적 의료제공을 할 수 없다. 고도급성기·급성기·회복기·만성기 등 질환의 시기별·의료 기능별 특성에 따른 구분도 고려해야한다.
세 번째는 지리적으로 사회적 도서지역과 의료적 도서지역이 다르다는 점이다. 교통이 발전하면서 의료 도서지역의 변화가 초래되어 이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올바른 의료전달체계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는 정책적으로 의료현장의 수혜자와 공급자의 상황을 모두 고려하여 정책 속도와 양을 아주 점진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정책은 너무 급진적으로 계획되고 시행되는 경향이 있다. 의료전달체계는 하루아침에 정착되는 것이 아니므로 국민들과 의료기관들이 적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 할 것이다.
다섯 번째는 공공의료의 정의도 재정립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모든 의료기관에 건강보험당연지정제가 적용되고 있다. 민간의료기관에도 공적사회보험이 강제되고 있는 것이다. 금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보듯이 민간의료기관과 의료인들은 각종 법령에 근거하여 공공적 성격이 강한 감염병 치료 및 방역에 강제 동원되고 징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단지 소유의 개념만을 기준으로 공공의대와 공공의료기관의 설립 확충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국민적 공감을 얻기 힘들다. 지금 전국의 국립의과대학이나 공공기관에 속한 의료기관들이 민간의료기관과 동일한 진료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공의료기관이라고 특별히 국민의 세금을 더 퍼부어야할 당위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의원급 활성화 정책 전제돼야
끝으로 의료전달체계의 대전제는 의원급 의료기관의 활성화를 우선하는 정책이 되어야 한다. 최근 10년간 우리나라에서 의료의 기반인 의원급 의료기관의 쇠퇴가 너무 두드려졌다. 이는 고스란히 국민의 접근성 저하와 건보재정의 악화로 귀결된다. 일차의료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차의료의 정의도 재정립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일차의료정의를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의료자원, 의료현장의 괴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개원가의 95%를 차지하는 전문의 의료자원의 효율적 활용에 대하여 중장기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선진국들도 과거 1차 진료 의사가 지역사회 보건을 책임지는 1차 의료 중심의 전달체계 개념에서 점차 각과 전문의의 수준 높은 의료서비스를 집 가까이에서 적정하게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일차의료의 재정립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의료전달체계 중장기 계획에 앞서서 제대로 안정되고, 현실적 효과를 이루기 위하여 상급종합병원의 기능을 우선 정립하고, 하위 의료기관의 기능을 이후에 정립하는 구조로 논의되어야 의료전달체계가 성공적으로 정착될 것으로 본다.
특히 전문의가 많이 분포된 의원급 의료기관의 서비스 제공 영역을 확대하고 전문화하여 영유아·노인 등 생애주기별 건강관리 서비스, 건강검진 사후관리 서비스 등 단계적 반영 검토, 우울증과 자살고위험군 스크리닝 검사, 지역사회 흔한 질병과 외상의 예방과 치료, 주요 감염성 질환 및 지역적 풍토병의 예방과 치료, 만성 혹은 재발하는 질병의 후속 관리 및 지속 관리 등을 해 나간다면 바람직한 전달체계 수립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의원급 의료기관의 경쟁력강화 방안중의 하나로 외래환자 본인부담률을 점진적으로 10%까지 인하하는 방안과 고가약 처방시 삭감금지, 경증 검사 삭감 제고, 의원급 의료기관 활용 캠페인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약물, 검사, 치료에 대한 삭감 감소, 환자에 대한 질병교육, 상담비용 인정, 환자의 관리비용 신설, 의원급 의료기관의 진료지침 개발 및 보급, 교육, 훈련 지원 등을 통한 진료능력 강화와 이로 인한 의원급 질 가산 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일차의료기관 관련 정책을 전담하나 지원할 수 있는 전담 부서 설치 및 기존에 추진된 바 있던 ‘일차의료 지원을 위한 특별법’ 논의도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겠다. 더불어 의원급 의료기관 ‘건강증진관리료’를 신설하여 동네의사가 지역주민 대상으로 건강의 유지 증진을 위한 건강관리계획 수립, 중간 관리 등 상담하고 관리해주는 형태를 건강보험재정이 아닌 국민건강증진기금으로 추진하는 것도 고려할 수도 있겠다.
특히 금번 전달체계 논의에서 외과계 의원급에 대한 별도의 고려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외과계 의원급은 그동안 논의 되었던 전달체계나 정책, 수가체계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온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의료전달체계가 사실상 붕괴 직전의 건물과 같은 상태다. 이처럼 위험하고 불편한 건물을 다시금 안전하고 편리한 건물로 리모델링하는 것과 같은 의료전달체계 재정립 시도는 빈 터에 집을 짓는 것보다 더욱 힘이 들 수 있다. 기존의 의료이용 문화를 바꾸는 과정에 환자의 반발과 민원이 정책 추진에 상당한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전세계는 코로나19로 인한 보건의료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 정부나 의료계 모두 코로나19를 대응하기에도 여력이 부족하다. 그러한 가운데 졸속으로 설계하고, 충분한 협의 없이 정책을 추진했다가 문제가 나타나게 되면 국민과 의료기관 혼선과 혼란으로 인한 부작용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의료전달체계는 국가의 한정된 보건의료 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할지에 대한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전달체계의 확립은 정부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며, 단기간에 이루어 낼 수 있는 성과물도 아니다. 그러므로 정부의 일방적 정책 시행보다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의료계와 충분히 협의하여 국민을 설득하며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의욕만 앞서 서두르는 것보다 전달체계 관련 의료법 등 관련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정부뿐만 아니라 국회, 의사협회, 병원협회 등 전문가 단체가 서로 힘과 지혜를 모아 총력 대응을 통해 국민을 위한 바른 의료전달체계를 개선해 나아가도록 함께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