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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법’ 지금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미술,문화로 읽다<18>
 

  한·중·일 서양화 수용과정  

[의학신문·일간보사] 1860년대 유럽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는 일본 문화에 푹 빠져 있었다. 일례로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가 바로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였다. 그런데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 준 우키요에가 일본인들이 한 세기 전 서양화 기법을 참조해 일본화한 그림이라는 점이 아이러니다. 문화접촉은 일방적인 듯하지만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보편적 진리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서화 전통에 뿌리를 둔 한‧중‧일 세 나라는 서양화를 어떤 관점에서 수용했을까? 지금 세 나라의 형국을 봤을 때 각국의 서양화 수용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 아닐까 싶다.

낭세녕이 그린 ‘취서도(聚瑞圖)’는 제목과 같이 상서로운 꽃들을 취합해 그린 그림이다. 화병이나 꽃을 보면 정확한 명암법과 채색으로 인해 서양의 정물화인 듯하지만, 배경을 그리지 않고 오른쪽 위에 낙관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전형적인 동양화다. 낭세녕은 청나라 건륭제의 어용 화가였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쥬세페 카스틸리오네의 중국 이름이다. 그는 1723년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옹정제의 즉위를 기념해서 이 그림을 그렸다.

중국, 통치 수단으로 서양화법 수용

낭세녕 왕치산 합작, 만수원사연도 萬樹園賜宴圖, 1754, 221.2x419.6cm, 북경고궁박물관

옹정제는 서양화의 월등한 사실적인 재현력이 자신의 치세를 선전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해서 그에게 황실 기록화를 제작하게 하였다. 한마디로 서양화법은 통치의 수단으로 궁정의 화원 회화체로 수용했다. 대표작으로 1754년 낭세녕과 왕치성이 합작으로 그린 ‘만수원사연도(万樹園賜宴圖)’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그해 여름 건륭제가 별장 만수원에서 서북방 소수민족 관원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어주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투시 원근법으로 스펙터클한 구도인데, 뒤쪽 천막으로 시선이 모이게 사람과 기구를 배치하였다.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서 서양화법을 유효적절하게 사용한 예다. 그는 명암법과 원근법을 구사하여 대단히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그리는 이의 뜻과 필력을 중시하는 서화 전통과 세상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는 중화사상으로 말미암아 중국인의 미감에는 미치지 못했다.

추일계가 쓴 이론서 ‘소산화보(小山畵譜)’에서 서양화에 대한 평이 좋은 예이다.

“서양인은 구고법(勾股法, 기하 또는 선투시법을 지칭)이 뛰어나서 그림이 음양, 원근 표현에 조금의 잘못도 없다. 그들 그림은 인물, 건물의 수목 등을 표현할 때 모두 빛과 그림자가 있다. 안료와 붓을 사용할 때도 중국과 완전히 다르다. 그림자는 넓은 전경에서 좁은 원경으로 삼각형을 이루도록 계산되어 있다. 그들이 벽에 궁전을 그리기도 했는데, 그것이 진짜와 같이 느껴져서 그만 그 속에 들어가고 싶어진다. 그림을 배우는 사람은 그들 그림 가운데 한두 가지 특질을 따서 사람의 눈을 끌게 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러나 필법은 일절 없으며, 기술은 뛰어나지만 화품(畵品) 수준에는 넣을 수 없다.”

일본, 실용성 주안점 두고 받아 들여

일본 역시 비슷한 시기에 서양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중국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수용하였다면, 일본은 에도시대 각 번(藩)의 재정 확충이 절실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이전까지 무관심했던 자연물에 관심을 가지고 학문적 연구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국익 차원에서 박물학 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다양한 도감이 간행되었는데, 참고서적은 서양에서 유입된 서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책의 내용보다도 게재된 동판화로 된 삽화의 정밀함에 매료되었다. 서양과학 서적을 본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소감이다.

“이것은 그림만 보아도 정밀하여, 이 속의 설(設)하는 바를 읽을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자세하게 요용(要用, 긴요하게 쓰임)이 될 것이다. 에도에서 누군가 배워두어야만 하겠는데 어의(御醫 野呂元丈), 어유학자(御儒學者 靑木文藏) 두 사람으로 하여금 시행하면 좋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실물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 최종적 목표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키타 번에서 아키타난가(秋田蘭画)라는 서양화풍의 그림이 시작되었다. 1773년 번주 사타케 요시아쓰의 초청으로 에도에서 당대 최고의 박물학자인 히라가 겐나이가 아키타에 왔다. 그는 우연히 그림 솜씨가 좋은 무사 오다노 나오타케를 만나 그에게 서양 서적의 삽화를 가지고 서양화법을 알려주었다. 타고난 화가인 나오타케는 일본 최초로 서양화풍 화가가 되었으며, 자신이 배운 서양화법을 번주와 무사들에게 전수하였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서양화풍 그림인 아키타난가의 연원이다.

아키타 번주는 ‘쇼잔사생첩’을 기획하였는데, 제3권에 ‘화법강령(畫法綱領)’과 ‘화도이해(畫圖理解)’ 같은 서양화론을 일본 최초로 저술하여 게재했다. ‘화법강령’의 핵심은 두 가지로 첫째 필법을 없애야 한다. 필법을 주로 하면 실용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세필로 형상을 그리고 채색을 해서 먹의 흔적을 없애야 한다.

둘째 여백을 없애고, 실재 공간을 도입해야 한다. 한마디로 실용을 위해서는 서화의 핵심 전통, 즉 기운생동을 추구하는 필획의 미학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화도이해’에서는 중요한 서양화의 특징을 설명했는데, 음영법과 원근법 두 가지다.

서양화풍인 아키타난가는 동양화와 달리 음영법과 원근법을 적용해서 실재 공간을 그렸다. 하지만 전경에 있는 사물을 과도하게 크게 그려 과장된 원근감에서 비롯되는 기이한 화면구도가 주제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이는 1860년대 파리 화가들을 사로잡은 우키요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실용성에 주안점을 두고 수용한 서양화법이 목판화라는 장르와 만나 일본화한 것이다.

조선, 해금 정책으로 변방국가 전락

조선은 이들과는 매우 다른 여정을 거쳤다. 특히 같은 시기 조선은 유일하게 세종 때부터 강력하게 시행한 해금(海禁)정책 탓에 대륙의 변방 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서양화는 연행사들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다. 하지만 통치 수단으로 수용한 중국이나, 현실적인 필요로 실용성에 주안점을 두고 수용한 일본과 달리 서양화법에 대해 어떤 사회적인 필요성을 못느꼈던 것 같다. 궁금함은 있었는지 정조 연간에 그린 그림 중 서양화법을 시도한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내 사라졌다. 게다가 조선은 병인년과 신미년 서양 오랑캐와 전쟁을 치른 후 완전히 나라 문을 닫아버렸다.

세 나라가 서양화를 수용하던 250년 전 모습을 살펴보면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서양화법’이 흘러들어 오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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