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17>

인상파와 우키요에

[의학신문·일간보사] 대부분의 서양미술사 책에서 인상파를 기술하면서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일본이 참가한 것을 중요하게 다룬다. 당시 일본은 박람회에 출품할 공예품들을 포장할 때 완충재로 망친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絵)를 사용했는데, 이 그림이 훗날 인상파라 불리게 되는 프랑스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는 형태를 중요시하는 전통 아카데미 풍의 사실주의에 반해, 색채를 중시하며 순간의 느낌을 포착하여 단시간에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비현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전통에 대한 저항으로, 모던한 현실을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인상파 화가들, 일본 목판화에 주목

그럼 이제 인상파 화가들이 서구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한 일본 목판화에 주목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인상파의 맏형이라 불리는 마네는 1865년 살롱전에 신화 속 여신이 아니라 매춘부를 그린 <올랭피아>를 출품하여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 이듬해에는 배경은 생략한 채 인물만 덩그러니 그린 <피리 부는 소년>을 출품하여 낙선하였다. 이 그림은 명암 대신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빨간색만의 강렬한 대비로 소년의 모습을 그렸기에 매우 평면적이다. 한편 <올랭피아> 속 여인은 금기시하던 외곽선을 뚜렷이 그렸다. 그래서 당시 비평가들은 평면적인 구성과 짙은 윤곽선으로 그린 그의 그림을 통속적인 판화를 지칭하는 ‘에피날 이미지(image d’Epinal)’라고 조롱했다.

이 같은 비난 속에서 에밀 졸라는 1867년 1월 1일 ‘La Revue du XIXe siecle’에 ‘마네는 현대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에 답례하듯 마네는 1868년 ‘에밀 졸라의 초상화’를 그려 살롱전에 출품했다. 그림 오른쪽에는 세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맨 오른쪽에는 ‘올랭피아’가 있고, 그 뒤에는 스페인화가 벨라스케스의 ‘바쿠스의 승리’가 보인다. 그리고 올랭피아 왼쪽에 일본 스모선수를 그린 우키요에가 있다. 화면 중심부에는 앉아 있는 에밀 졸라 등 뒤에는 일본 병풍이 세워져 있는데, 병풍 속 그림은 전형적인 동양의 ‘화조화(花鳥畵)’다. 이로써 마네가 우키요에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모네는 1876년에 개최된 두 번째 인상파전에 ‘일본풍(La Japonaise)’이라는 제목으로 화려한 빨간색 기모노를 입고 춤을 추는 듯한 아내 카미유를 그려 출품했다. 그림 속 벽과 바닥에는 우키요에가 그려진 부채로 가득 차 있다. 모네는 말년에 지베르니 집에 수련이 있는 연못을 꾸미고는 일본식 다리를 만들어 그 풍경을 즐겨 그렸다. 반 고흐는 1887년 다수의 우키요에를 따라 그렸으며, 그 해 그린 물감 가게 주인 ‘탕기 영감’ 초상화 배경에도 우키요에를 그려 넣었다. 반 고흐의 우키요에 사랑은 남달랐다.

우키요에는 에도(江戸)시대, 즉 지금의 도쿄에서 목판 인쇄로 제작된 일종의 풍속화다. 우키요(浮世)는 원래 근심스러운 세상이란 의미의 우키요(憂世)로 쓰였다. 그러나 에도 시대 즈음에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상인계층 조닌(町人)이 문화 주체로 대두되며 뜬구름처럼 현실을 즐겁게 지내자는 긍정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이 같은 현세관이 반영되어 현실을 낙천적인 서민의 눈으로 그린 그림이 바로 우키요에다. 우키요에는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목판 인쇄를 했고, 소비자의 요구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소재는 요즘으로 치면 유명 연예인 브로마이드라 할 수 있는 가부키 배우부터 관광엽서라 할 수 있는 도시 풍경까지 다양했다.

우키요에의 시작은 목판본 소설에서 비롯되었다.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1694)는 소설 삽화를 독립된 그림으로 위상을 정립시킨 장본인으로, 우키요에의 아버지라 불린다. 초기에는 손으로 그리다 수요가 급증하자 단색 판화로 전환했으며, 점차 기술 발전에 힘입어 다색 판화가 되었다. 18세기 중엽에는 유일한 개항장이었던 나가사키 항을 통해 서양 원화와 서양화 영향을 받은 중국 소주(蘇州)판화가 유입되었다. 그에 따라 서양 원근법이 적용된 그림이 등장하였으며, 필력을 중시하는 전통 수묵화는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서양화풍의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물산학(物産學)의 발전과 더불어 난학(蘭學), 즉 서양 학문이 발흥하던 시기와도 일치한다. 18세기 말 시바 고칸(司馬江漢)은 원근법과 명암법을 완벽하게 구사한 동판화와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세기 들어 이 같은 서양화 기법을 응용한 우키요에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당시 유럽에도 널리 알려진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와 안도 히로시게(安藤広重)가 있다. 호쿠사이는 원근과 명암을 과장되게 표현하며 대상을 단순화시킨다. 그와 달리 히로시게는 서양화 기법으로 공간감을 잘 살리고 거기에 정감 어린 자연 정취의 동양적 서정성을 융합시킨 작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반 고흐가 그의 그림을 여러 점 모사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키요에는 일본인들이 일본화에 서양화 기법을 융합해서 일본화한 대중문화상품이라 할 수 있겠다.

우키요에, 일본화에 서양화기법 융합

이 같은 우키요에 화집들은 1853년 일본이 개항하기 전 이미 일본과 교역을 하고 있었던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에 소개되었다. 이보다 앞서 18세기 유럽 귀족 사이에서는 동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시누아즈리(chinoiserie), 즉 중국풍의 장식이 널리 퍼졌으며, 특히 프랑스에서는 일본의 옻칠 공예품이 유행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후 중국풍을 즐기던 귀족층이 몰락하고 신고전주의 미학이 대두되면서 중국과 일본 미술품 거래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학자들을 중심으로 동양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높아지며 1840년대부터 동양 유물 거래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네덜란드 전시관을 통해 일본 미술품이 거래되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해 미술비평가 자카리 아스트릭은 파리 일간지 ‘에탕다르(L’Etandard)’에 일본 예술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그는 일본을 ‘동양의 그리스’라고 소개하며, 일본 미술이 프랑스 회화발전을 위한 창작의 원천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1860년대 파리는 일본 문화에 푹 빠져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자포니즘(Japonisme), 즉 일본풍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일본 미술의 장식적이면서도 간결함을 높이 평가했다.

이 같은 시대 상황에서 아카데미 풍의 사실주의를 거부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파격적인 구성과 형태의 간결함, 그리고 풍요로운 색채로 제작된 우키요에는 그들 고민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연구대상이었다. 결과는 자유로운 표현과 시각의 솔직함 그리고 순간성을 기반으로 모던한 삶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서양화 기법을 참조해 발전시킨 우키요에가 한 세기 지나 유럽에 소개되어 자포니즘이라는 열풍을 일으킨 것을 보면서 문화접촉은 일방적인 듯 하지만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보편적 진리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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