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15>

모던 아트의 선구자 마네

[의학신문·일간보사] ‘근대적’이라 번역하는 ‘Modern’의 사전적 의미는 “existing in the present or a recent time, or using or based on recently developed ideas, methods, or styles”이다. 우리말로 ‘현재 혹은 최근에 존재하는, 또는 최근에 전개된 생각, 방법 혹은 양식에 기초하거나 사용하는’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따라서 ‘모던 아트’라 하면 가까운 과거를 의미하는 ‘근대 近代’보다는 ‘현대’ 혹은 ‘최근’ 미술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마네를 ‘모던 아트의 선구자’라 함은 그 이전의 화가들은 주체적으로 자신이 사는 시대를 토대로 그리지 않았음을 뜻한다. 당시 유일한 작가 등용문이었던 살롱전의 심사기준을 보자. 프랑스 살롱전은 1667년부터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가 개최해 온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권위를 바탕으로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교훈적인 내용을 담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을 최고로 인정했다. 이 같은 기준을 토대로 1863년 살롱전 심사위원회는 응모작품 5,000점 중 2,783점을 낙선시켰다. 낙선작 중에는 19세기 아방가르드 회화의 선구자인 쿠르베, 10년 후 등장하는 인상파의 맏형인 마네, 그리고 인상파 화가이며 스승과 제자라 할 수 있는 피사로와 세잔의 작품도 포함되었다.

살롱전 200년 역사상 출품작 중 절반이 훨씬 넘게 낙선한 것은 유례 없는 일이었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낙선자들은 편파적인 심사라고 반발했으며, 당시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이런 여론을 수용하여 1863년 5월 15일 산업관 Palais de l'Industrie에서 낙선작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회를 개최하도록 하였다. 그에 따라 사상 초유의 『낙선전 Salon des Refusés』이 열렸다. 직접 대중이 직접 심사 결과에 대한 정당성을 판단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쿠르베는 『종교집회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출품해 낙선했다. 제목만으로는 종교화라 짐작할 수 있겠으나, 실제로는 만취한 듯한 신부들이 종교집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주민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품위 없이 비틀거리며 웃고 환담하는 장면을 그린 심히 불경스러운 그림이었다. 쿠르베는 이 그림이 낙선하자 “나는 이 작품이 살롱전에서 낙선하게 그렸고, 성공했어. 이 그림은 내게 돈을 가져다줄 거야!”라며 자랑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출품한 것은 살롱전 권위에 대한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낙선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워낙 커서 하루에 천 명 이상의 관람객이 이 전시를 봤다.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에밀 졸라는 기사에, 관람객들로 붐비는 전시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밀치고, 전시장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고 전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웃음거리가 된 작품은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식사』였는데, 살롱전에는 『목욕』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했었다.

마네의 그림은 쿠르베의 그림과는 달랐다. 쿠르베의 그림은 한 장의 스냅 사진과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를 그렸기 때문이다. 쿠르베는 객관적인 그림을 그려 극적으로 연출된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을 최고로 인정하던 살롱전의 권위에 도전했는데, 마네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기존 살롱전의 규범에 대한 도전이었다. 먼저 이 그림 크기(2.08x2.64m)의 캔버스라면 관례상 당연히 엄숙하고 교훈적인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려야 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작품 제목과 같이 세속적인 순간을 그렸다. 숲속에 네 명의 남녀가 소풍을 나와 점심을 먹은 듯한 장면이다. 옷을 입은 두 남자와 누드의 여인이 전경에 있고, 그들 뒤 저만치에서 한 여인이 얇은 속옷만을 입고 목욕하고 있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여인이 벗어놓은 옷가지와 그 위에 엎질러진 과일 바구니, 그리고 빵과 술병(?)이 놓여 있다.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어색하다. 가운데 앉아 있는 남자는 오른쪽의 남성이 자신을 보고 말하고 있음에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뒤쪽에서 목욕하고 있는 여자는 이들과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인다. 왼쪽에 벌거벗고 앉아 있는 여인은 대담을 나누고 있는 것 같은 두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다. 더욱이 누드임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을 그리는 화가, 바꿔 말하면 관람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만연한 매춘과 연관되어 저속하다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실제 그림 속 여인은 신화 속 팔등신 미인이 아니라 뱃살이 접힌 평범한 여인이고, 두 남자도 마찬가지로 학생과 산책하는 사람 flaneurs 복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누드 여인의 모델은 1865년 살롱전에 출품한 『올랭피아』의 모델이기도 한 빅토린 뫼랑 Victorine Meurent이며, 두 남자 중 오른쪽에 있는 남자는 마네의 두 형제, 유진 Eugène과 귀스타브 Gustave를 조합하였고, 왼쪽에 있는 남자는 그의 처남인 네덜란드 조각가 페르디난드 린호프 Ferdinand Leenhoff이다.

마네는 이 그림의 영감을 두 점의 16세기 이탈리아 걸작에서 얻었다. 두 명의 누드 여인과 옷 입은 남자 두 명의 조합은 티치아노 혹은 조리지오네의 『전원음악회』를 참조했고, 누드인 여인과 그 주위에 기대 누워 있는 두 명의 남자라는 구성은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에서 한 부분을 빌려왔다. 그리고 그림 왼쪽 아래 과일 바구니는 마치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를 보는 듯하다. 따라서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이 어떤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 그림은 맥락 없이 파편화된 그림이다. 한마디로 의미가 부재한 그림이다.

이 그림이 비난받은 또 다른 이유들은 붓 터치가 남아 있어 미완성 같이 보인다는 점, 전통적인 명암법을 따라 그리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원근법이 맞지 않아 평면적인 느낌이 든다는 것들이었다. 마네는 1853~56년에 독일, 이태리, 네덜란드를 돌아보며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와 스페인의 벨라스케스와 고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마네는 그중에서도 프란스 할스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몇 번의 붓질로 그린 듯한, 이태리 말로 ‘단번에’, ‘일시에’를 뜻하는 ‘알라 프리마 alla prima’ 기법으로 거친 붓 자국을 그대로 남긴 상태로 그림을 마무리했기 때문에 미완성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중간 톤을 생략하고 인물의 윤곽선을 강하게 그렸기 때문에 명암법에 따른 입체감은 감소하면서 평면적으로 되었다. 게다가 뒤에서 목욕하고 있는 여자는 앞에 있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거리에 비해서 너무 크게 그려 원근법에 어긋났다.

마네의 그림은 당시 기준으로 봐서는 미완성이고, 맥락이 없는 이미지들의 조합이기에 그 어떤 교훈적인 내용도 담고 있지 않음에도 관객의 치부-당시 만연한 매춘-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아방가르드 미술, 즉 전위미술의 선구자라는 쿠르베보다도 더욱더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네는 숱한 비난과 더불어 살롱전에 여러 번 낙선했지만 계속해서 출품했다. 작가로서 입지를 굳힐 수 있는 유일한 전시이기도 하거니와 전략적으로도 기존 권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실보다는 득 될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한편 그는 “일본의 영향, 스페인의 영향, 이것이 나의 원천들이다. 그러나 나의 목적은 모던 미술이다”라고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마네가 모던 아트를 추구하게 된 것은 젊어서 만난 시인 보들레르가 쓴 글 「현대적 삶의 화가 Le peintre de la vie moderne」의 영향과 함께 비난에 시달리는 그의 그림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준 에밀 졸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던 아트는 결국 문학과 철학으로부터 독립해서 작가의 독창성과 예술의 독자성을 중시하게 된다.

마네가 추구한 모던 회화는 이후 게르부아 카페에서 지속적인 만남을 가진 일군의 청년작가들에 의해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그들은 다름 아닌 훗날 인상파라 불리게 되는 작가들이다. 마네는 인상파 화가들이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의 외광파(外光派)라 불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자유에 대한 숭배, 주제의 근대성, 시각의 솔직함과 순간성을 통해 미래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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