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15>

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

[의학신문·일간보사] 물의 요정들이 강변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중 목신(Faun, 그리스 신화 등장 인물로 머리와 몸은 사람, 허리부터는 짐승인 반인반수의 신)이 부른 피리 소리에 놀라 도망을 치기 시작한다. 목신은 그들이 여자인 것을 알고 따라가서 두 명을 겁탈하고, 이 일에 분노한 신들은 목신에게 벌을 내린다. 다음 날 목신은 잠에서 깨어난다. 어제 요정들이 목욕을 하고 있었던 일이 생각나는데,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이 안가는 상황이다. 멍하니 회상을 하다가 또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포옹하는 환상에 잠기며 또다시 잠에 빠진다.

신들의 희롱과 유희가 묘사된 위 내용의 시를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1800년도 후반 유럽의 주류 음악이었다면, 아주 강렬하면서 기교적이고 진한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1800년도 후반 유럽은 독일 음악, 특히 바그너 음악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바그너의 음악은 기교적으로 화려하고 감성적으로 풍부했다. 당연히 대중은 그러한 음악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달빛(Clair de Lune)”으로 잘 알려진 인상주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는 달랐다. 드뷔시는 “목신의 오후(Prelude to an afternoon of a faun)”에서 직설적인 표현을 벗어 던지고, 몽환적이고 꿈꾸는 듯한 느낌을 플룻, 하프, 크로탈(작은 심벌즈로 오묘한 소리를 냄) 등의 나른하고 환상적인 선율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한다. 드뷔시는 간접적인 접근으로서 스토리의 느낌과 장면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파리 음악원

드뷔시는 처음부터 규율과 형식을 벗어던지는 음악을 한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1862년 파리의 소박한 가정의 장남으로 탄생한 드뷔시는 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지만, 주변의 후원을 통해 파리 음악원에서 11년 동안 수학을 하게 된다. 드뷔시 역시 초기에는 바그너의 음악에 매료되어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에 참관하기도 하였으나, 지나치게 장황하고 자기 과시적인 음악에 금방 환멸을 느끼게 된다. “왜 사람들에게 꼭 익숙한 음악을 써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 드뷔시는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 나가기 시작한다.

드뷔시, 규율·형식 벗어나 자신만의 음악세계 창조

그러다 보니,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할 당시에도 그의 여러 스승들은 그의 곡들이 개성이 지나치게 넘친다고 혹평을 하였고 뿐만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드뷔시의 작품을 접하게 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였던 차이콥스키(Tchaikovsky) 조차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는 모호하고 미묘한 화성, 왠지 모르게 낯선 컬러, 모호한 방향성, 느슨한 선율이라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기이하다’라는 반응과 함께 환영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드뷔시는 왜 이러한 음악을 했을까? 드뷔시에게 한 교수가 물었다. “자네는 도대체 무슨 법칙을 지키나?” 그는 대답했다. “제 자신의 즐거움 외에는 아무것도 지키는 법칙이 없습니다” 즉, 드뷔시에게 ‘음악이란, 전통적인 기법이나 형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듣는 이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그 역할은 이미 다한 것’이었다.

Claude Monet 의 작품 “Le bassin aux nympheas” (1917-1919)

이러한 음악적 가치관을 지닌 드뷔시는 프랑스, 러시아, 중세 음악, 동양 음악 등에서 얻은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혼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하고 개성있는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다. 순간의 분위기 또는 뉘앙스를 나타내는 음악, 뚜렷한 목적지 없이 마냥 흘러가는 음악,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느낌과 인상을 표현하는, 즉 인상주의적 작품들을 탄생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드뷔시는 동시대에 프랑스 몽마르트에서 친하게 지냈던, 독특함의 상징인 에릭 사티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 베를렌, 발레리, 말라르메 – 등을 비롯하여 고갱, 마네,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아주 두터운 친분이 있었는데, 이러한 주변 예술가들로 부터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목신의 오후’ 성공적 초연 후 스타 반열에 올라

그리고 클로드 드뷔시는 “목신의 오후”를 성공적으로 초연하게 된다. 관객들은 처음 접하는 신선한 음악에 열광하였다. 물론 비평가들은 혹평을 하였지만, 수년이 지난 후에는 결국 작품의 진가를 인정 받게 된다. 작품의 인기 때문에 드뷔시는 대번에 파리의 스타 작곡가가 된다. 인기 화가들이 앞다투어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그는 낡은 집을 떠나 호화로운 저택으로 이사를 갔을 뿐 아니라,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는 등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표현한 그림

그는 말했다. “나는 음악을 열렬하게 사랑한다. 사랑하는 까닭에 나는 그것을 숨막히게 하는 전통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음악은 영혼의 서정적 발로와 꿈의 환상에 충분히 순응할 수 있는 유연한 것이어야 한다.”

익숙함과 형식에 요동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색깔을 찾아낸 진정한 자유로운 영혼, 클로드 드뷔시. 음악의 자유를 향한 그의 대범한 행보는 새롭고 독자적인 음악 언어를 추구하는 20세기 이후 수많은 예술작품에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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