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윤 정내과의원장

[의학신문·일간보사] 문이 열리더니 “안녕하셨소?” 하는 인사와 함께 할머니 한 분이 진료실로 들어오신다. 낯이 익숙치가 않아 대답을 하는둥 마는둥하며 진료프로그램을 슬쩍 보니 고혈압으로 우리 의원에 다니시다가 3년전에 마지막으로 오셨던 분이다. ‘손주 봐주러 따님 댁에 들어가서 지내실 예정’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기억나는 것도 같아 어떻게 지내셨냐 물으니 이제 손주가 어린이집에 가게 되어 다시 이전 집에서 주로 지내신단다.

그 사이에 없던 당뇨도 생겼고 드시는 약도 많아졌다고 하시며 약 봉투를 주섬주섬 꺼내 놓으신다. 작년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지도 보여주신다. 드시는 약을 확인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조만간 당화혈색소 등 검사를 해보자고 계획하고 진료를 마쳤는데 처방을 내려니 초진인지 재진인지 헷갈린다.

만성질환 환자는 첫 한번을 제외하면 평생 재진이라고 알고 있지만 3년만에 오셨고 초진에 준하는 진료를 했는데 재진으로 청구를 해야하니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전에 어느 모임에선가 이 문제를 놓고 난상토론(?)이 벌어졌던 기억이 난다. 다들 개원한지 제법 된 중견 의사들인데 초진과 재진 기준 이야기가 나오자 서로 본인이 맞다며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어떤 선생님이 만성질환관리료를 받는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만성질환의 경우, 치료를 종결한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평생 재진으로 청구해야 한다하니 다른 선생님은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냐며 내원한지 90일이 넘어가거나 새로운 증상으로 인해 다른 상병으로 청구하면 초진이 맞다고 했다. 한참을 양측이 옥신각신하는데 결국 “그렇게 했다가 삭감당했어”하는 다른 선생님의 말씀에 모두 조용해졌다. 이런게 ‘심평의학’이라며 다들 허탈해했다.

일반적으로 의사가 환자를 처음 만나는 첫 진료를 초진이라고 한다. 의사는 초진에서 환자의 주관적인 증상을 바탕으로 현병력과 과거력, 각종 정보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필요한 진찰을 통해 병명을 유추하고 필요한 검사와 치료의 계획을 수립한다. 따라서 초진은 재진에 비하여 의사가 투입하는 노력과 시간이 더 클 수 밖에 없고, 의학적인 판단의 난이도 역시 높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단순히 다시 내원한 환자라고 해서 재진이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기존에 치료하던 질환과 전혀 별개의 다른 증상으로 내원하거나 상당기간이 지난 후에 내원하여 사실상 초진에 준하는 진료가 필요한 경우들이 그것이다. 환자와 구면(舊面)이라고 해서 재진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의 초진과 재진 산정기준은 이런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여 불합리한 사례들이 자주 발생한다. 더군다나 기준이 너무 복잡해서 환자는 물론, 의사조차도 헷갈릴 정도여서 환자와 의료기관 사이의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의사와 환자의 신뢰를 저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최근 의사협회가 불합리한 수가 산정 기준의 개선을 아젠다로 정부와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낮은 의료수가의 개선도 시급하지만 넘어야 할 여러 현실적인 벽을 고려한다면 먼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여러 불합리한 기준을 찾아내 고쳐나가는 것이 첫 걸음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진찰은 의사가 행하는 의료행위 중에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행위인 만큼, 여러 의료 수가 중에서 진찰료가 갖는 상징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고 초진과 재진이 갖는 의미와 차이를 반영할 수 있는 상식적인 기준의 마련을 기대해본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