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14>

아방가르드 미술의 출발, 쿠르베의 사실주의

[의학신문·일간보사] 흔히 ‘현대미술은 난해하다’고 한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이기 때문이다. 전위(前衛)는 프랑스어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번역어로, 최전방에서 적을 정찰하고 탐색하는 소수 정예부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전위미술가라 하면 전통을 배척하고, 전통에서 탈피한 실험적이면서도 과격한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를 지칭한다.

서양미술사에서 전위미술의 선구자라 하면 당연히 사실주의를 추구한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를 꼽을 수 있다.

역사와 신화 소재 아카데미 화풍 거부

그는 천사와 여신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그리는 데 관심이 없다며, 당시 파리화단을 지배하고 있던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한 전형적인 아카데미 화풍을 거부했다. 더군다나 그는 화가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1877년 쉰여덟에 망명지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한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쿠르베의 정치적인 성향은 그의 출신 배경이 크게 작용했지 않나 싶다. 그는 1819년 스위스와 접경지역인 오르낭(Ornans)의 부유한 농부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외할아버지는 프랑스혁명에 나가 싸웠다고 한다. 군주제를 반대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그는 1839년에 파리로 갔다. 그 해는 바로 사진술이 발명, 공포되던 때였다.

쿠르베 <오르낭의 장례식> 1849-50, 314x663cm, 유화, 오르세미술관 소장

파리에서 쿠르베는 전통 미술교육에는 흥미를 못 느껴 루브르박물관에 가서 거장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모색했다. 그리고 1846~47년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여행하면서 렘브란트와 프란츠 할스 같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즉 그는 화가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쿠르베가 ‘사실주의’라는 반시대적인 그림을 어떻게 그리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시대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789년 대혁명 이후 근 100년간 두 차례(1830, 1848) 혁명을 통해 다양한 정치체제와 사상의 결말은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자유로운 삶,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탄생한 <파리 코뮌>이라 할 수 있다. 민중들은 72일 동안 완벽한 시민자치를 시행했으나 불행하게도 정부군에 의한 유혈참극으로 막을 내렸다.

쿠르베 정치 성향과 그림은 매우 밀접

쿠르베는 이러한 ‘파리 코뮌’ 교육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예술가연합을 조직하여 “정부의 모든 감독과 특권으로부터 해방된 예술의 자유로운 발전, 연합회원 전체의 권리 평등, … 예술가 각자의 독립성과 존중 보장”을 위한 정책을 제안한 정치 활동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그런 활동의 결과 그는 스위스로 망명하게 되었고, 거기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이같은 그의 정치적인 성향과 그의 사실주의라는 반시대적 그림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쿠르베 <오르낭에서 저녁 식사 후> 1849, 195x257cm, 유화, 릴 미술관 소장

1849년 쿠르베는 살롱전에 <오르낭에서 저녁 식사 후>를 출품해서 금상을 받았다. 고향 집에서 저녁 식사 후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술을 마시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 속 한 명은 쿠르베의 아버지고, 나머지 세 사람 모두는 친한 친구들이다.

이같이 평범한 시골 농부의 일상을 그린 이 그림의 크기는 195×257cm로 그림 속 인물은 실물 크기다. 이만한 크기의 그림임에도 그는 이전 작가들과 달리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와 같은 살롱 전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소재를 선택한 후 배우를 모델로 그리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극적이면서도 이상적으로 연출해서 그리지 않았다. 대신 실제 공간에 있는 실제 인물을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그렸던 것이다. 특히 그림 속 인물 배치는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오르낭에서 저녁 식사 후>는 농부들을 그린 그림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색조는 브라운 계통으로 농촌의 소박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그림 오른쪽에서 빛이 들어오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채광이다.

전체적인 그림의 느낌은 한 장의 스냅사진을 보는 듯하다. 바꿔 말하면 인위적인 꾸밈없이, 눈에 보이는 장면을 매우 객관적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이 그림은 이런 점에서 이전에 역사나 신화를 소재로 그린 살롱전 출품작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1850년 살롱전에 출품한 <오르낭의 장례식>도 매한가지다. 이 작품 역시 쿠르베의 큰 삼촌 장례식을 그대로 그린 그림으로 314×663cm의 대작이다. 이전에 이런 크기의 캔버스에는 역사화를 그리는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그는 엄숙하고 교훈적인 역사화 대신 삼촌 장례식을 치르는 친지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사제를 있는 그대로 어떠한 상상력도 자극하지 않는 평범하고 무덤덤한 의식으로 그렸다. 쿠르베는 당시 파리화단의 이단아였다!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 7년간의 나의 예술적, 도덕적 생활이 요약된 참된 알레고리>, 1855, 359x598cm, 유화, 오르세 미술관 소장

쿠르베는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살롱전에 <화가의 작업실 : 7년간의 나의 예술적, 도덕적 생활이 요약된 참된 알레고리>를 출품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작품도 598x351cm 크기의 대작이다.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인 ‘알레고리’라는 부제로 인해 이 그림은 그가 사실주의 화가로서 지난 7년간 고민해온 바를 은유적으로 드러낸 그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쿠르베는 화면 중앙에 풍경화를 그리고 있는 자신을 배치하고, 좌우에 서로 다른 무리의 사람을 그렸다. 오른쪽에 그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무리는 그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이다. 이와 달리 왼쪽 무리는 그에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바라보며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그가 그동안 그린 그림에 등장했던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림 가운데에 아카데미 미술을 상징하는 누드의 여인은 그의 뒤에서 서서 그가 그리는 풍경화를 바라보고 있다. 이는 그가 반시대적인 사실주의자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왼쪽 바닥에 놓인 기타와 모자는 낭만주의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 왼쪽에 사냥개와 함께 앉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는 바로 그가 혐오했던 당시 황제 나폴레옹 3세다. 그림 속에서 그의 그림을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은 오로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뿐이다. 그런데 쿠르베는 자신을 그림 한가운데 그린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자신이 좌우 서로 다른 무리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쿠르베 사실주의 ‘인상파’ 화가에 영향

쿠르베가 눈앞에 보이는 사물 그대로를 그리고자 한 것은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살롱전에서 최고의 장르로 인정받고 있던 역사화와 신화화는 모두 연출된 극적인 장면이었다.

따라서 1848년 2월 혁명을 통해 제2공화국을 성립시킨 세대로서 쿠르베와 같은 무정부주의자의 일련의 정치적인 경험, 즉 1852년 쿠데타에 의한 제2제정 선포로 체제가 과거로 회귀한 것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꿈꾸던 이상이 물거품이 된 상황에서 그들은 오로지 사실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당시는 과학의 시대로 과학적 세계관과 합리주의가 관념론과 전통주의를 도태시켰다. 따라서 주관보다는 객관성이 중요하고, 개성을 배제하며, 무감각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대상이었다. 이런 시대상을 온전히 담아 그리기 시작한 작가가 바로 쿠르베인 것이다.

“나는 쉰 살이고, 지금까지 자유롭게 살아왔다. 나는 삶을 자유롭게 마치고 싶다. 나는 죽어서 ‘그는 어떤 화파, 교회, 협회, 아카데미, 특히 자유 체제 이외에는 어떤 체제에도 속하지 않았다’라고 회자 되고자 한다.” 쿠르베의 회고이자 바람이었다.

쿠르베가 추구한 사실주의는 이후 ‘인상파’ 화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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