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13>

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

중년의 라흐마니노프

[의학신문·일간보사] 1873년에 태어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의 아버지는 근위대 대장, 어머니는 장군의 딸로서 러시아의 일류 귀족 가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음악 애호가였고, 아버지 또한 음악을 좋아하여 정기적으로 집에서 가정 음악회를 여는 등 그에게는 음악이 생활화된 윤택한 유년기였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가 9세 때 아버지가 도박을 비롯하여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는 바람에 엄청난 빚을 지게 되면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살던 집은 팔리게 되고, 라흐마니노프의 가족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작고 낡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된다. 가문의 내력 상 어린 세르게이는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장교가 되는 것이 마땅한 진로였으나 군사학교의 학비가 너무 비싼 나머지 입학이 어려웠고, 대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다니게 된다.

그는 원래 어릴적부터 변덕이 심하고 지나친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아이였다. 오죽하면 별명이 ‘유아독존’이었을까. 어린 세르게이에게 누나의 사망과 아버지와 형의 가출이라는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생겼고, 그로 인하여 세르게이의 방황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학업에는 전혀 뜻이 없었는지, 아니면 유년기의 반항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낙제를 하는 등 엉망으로 학업 생활을 하였고, 이를 걱정하던 가족들은 그를 모스크바의 고모 집으로 보내게 된다.

라흐마니노프 ‘작곡과 연주’ 두 마리 토끼 쫓아

그런데 12살에 모스크바에서 니콜라이 즈베레프(Nikolai Zverev)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즈베레프의 엄격하고도 체계적인 훈육에 어린 세르게이는 음악을 비롯하여 예의 예절, 문학 등에 대하여 배우면서 한 음악인과 동시에 한 인간으로 성장하면서 성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작곡이 아닌, 연주에만 쏟기를 원했다. 두 마리의 토끼 모두 잡고 싶었던 라흐마니노프는 선생님 몰래 작곡을 시도하다가 들켜서 결국 쫓겨나게 된다. 그 후 14살이란 어린 나이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금메달을 받아 조기졸업을 하는 등, 작곡가로서 성공의 반열에 서게 된다. 당시 러시아의 최고의 음악가로 알려진 차이콥스키가 젊은 라흐마니노프의 졸업 연주를 감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했을 정도니 말이다.

스승 즈베레프(왼쪽 원 안)와 소년 라흐마니노프(오른쪽 원 안)

하지만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한 사건이 곧 발생한다. 24살의 라흐마니노프가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그의 첫 교향곡의 초연공연이 처참한 실패였던 것이다.

당시 지휘를 맡았던 글라즈노프(Alexander Glazunov)가 사전 리허설을 제대로 하지 않고 술에 취해 지휘를 한 것도 문제였지만, 당시 실세를 잡고 있던 러시아 5인조 중의 한 명인 세자르 쿠이(Cesar Cui)의 잔혹한 비판-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은 성경에서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할 때 내렸던 10대 재앙 중에 하나와 흡사하다”- 은 더욱 젊은 작곡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크나큰 충격에 빠진 라흐마니노프는 말했다. “내 속에 무엇인가 부러져 버렸다. 나는 작곡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뿌리 깊은 무감각이 날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 그는 한 동안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고 한다.

이러한 라흐마니노프가 무기력증과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바로 그를 치료한 심리학자이자 피아노 협주곡 2번이 헌정된 니콜라이 달(Nikolai Dahl) 박사였다. 달 박사는 음악가가 자신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나는 다시 곡을 쓸 수 있다. 그리고 그 곡은 최고의 곡이 될 것이다”라는 암시와 최면요법을 수 개월동안 시도하였고, 그 이후 만들어진 협주곡 2번은 초연 하자마자 엄청난 성공을 이루며, 그는 곧 세계적인 작곡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피아노 레파토리에 있어 손꼽을 만한 ‘대작’ 작곡

미국으로 망명한 라흐마니노프. 그는 미국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간판 스타였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이후에도 피아노 레퍼토리에 있어서는 손꼽을 만한 훌륭한 대작들을 작곡하게 된다. 그러다가 18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귀족의 신분으로 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게 되고, 그는 유럽을 떠돌다가 결국 미국에 정착하면서 작곡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이 직접 자신의 곡들을 연주하는 음반을 내는 등 연주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다 세상을 떠난다.

우리는 라흐마니노프를,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나서 조국을 그리워하면서 활동하던 음악가로 기억할 수도 있으나, 무엇보다도 몇 년간의 심각한 우울증으로 단 한 음표도 쓰지 못하고 슬픔과 비탄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아픔을 딛고 일어나 최고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탄생시킨 한 음악가로 기억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협주곡 2번은 ‘노다메 칸타빌레’ ‘호로비츠를 위하여’ 등의 다양한 드라마, 영화, 광고에 수록되어 음악 애호가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으로, 러시아의 깊은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중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작곡가가 경험한 깊은 우울과 우수가 짙게 번져 있는 곡이다.

작곡가가 직접 경험한 아픔과 회복의 시간이 말해 주듯, 마음이 힘들 때 감상하자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음악의 선율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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