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11>

조선의 18세기, 진경시대Ⅱ

[의학신문·일간보사] 앞서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 작은 중화사상이 확산되면서 ‘우리 모습을 우리 식으로 그린다’는 진경 시대가 열렸음을 살펴봤다. 대표적인 화가로 삼재(三齋), 곧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그리고 현재 심사정으로, 그들은 모두 선비로 문인화가였다. 그들 뒤를 이어 삼원(三園), 즉 단원(檀園) 김홍도(1745~?), 혜원(蕙園) 신윤복(1758~?) 그리고 오원 吾園 장승업(1843~1897)의 시대가 열렸다. 삼재와 달리 삼원은 모두 직업 화가였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열세 살 차이니 동 시대에 활동한 화가였다. 2008년 가을 김홍도와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한 팩션(faction=fact+fiction) 소설 ‘바람의 화원’이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어 안방극장을 달궜다. 작가 이정명은 신윤복이 조선 풍속화의 한 획을 그은 도화서 화원임에도 속화(俗畫)를 즐겨 그렸기 때문에,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기록이 전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러고는 신윤복이 여성이었을 거라는 상상을 가미해 두 사람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 그리고 연인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한편 어려서 부모를 여읜 고아가 역경을 딛고 화원 화가가 된 장승업의 생애는 2002년 영화 ‘취화선’으로 만들어져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삼원의 작품을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의 순으로 살펴보자.

김홍도의 스승은 시와 서예 그리고 그림 모두에 능해 삼절이라 추앙받았고, 당대 최고의 비평가로 알려진 표암(豹菴) 강세황이다. 김홍도는 강세황의 집을 일곱살 때부터 드나들며 글과 그림을 배웠다.

강세황의 “표암유고(豹菴遺稿)의 단원기(檀園記)”에 의하면 그는 김홍도를 신필神筆이라 극찬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게 인물, 산수, 선불(仙佛), 꽃과 과일, 동물과 곤충, 물고기와 게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지 다 잘 그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단원 김홍도, 선비적인 삶을 지향

김홍도는 선비로 사는 삶을 지향했다.

그의 자 字가 선비만이 할 수 있다는 의미의 사능(士能)인 점과 호 단원이 명나라 말 유명한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바람은 그의 나이 쉰 살 즈음에 그린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포의풍류란 벼슬하지 않는 선비가 베옷을 입고서도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배경은 생략한 채 그림의 주인공은 맨발에 큰 당비파를 연주하고 있는데, 그 주변에는 다분히 선비 취향의 소재들인 문방사우와 서책, 골동품, 호리병, 검, 생황, 파초잎 등이 놓여 있다. 그림 왼쪽 위에 ‘지창토벽(紙窓土壁) 종신포의(終身布衣) 소영기중(嘯詠其中)’, 즉 ‘종이창에 흙벽 바르고 이 몸 다할 때까지 벼슬 없이 시가나 읊조리련다’는 화제를 쓰고 ‘단원’이라고 낙관했다.

혜원 신윤복, 현실묘사 일갈 이뤄

‘화사보략(畵史譜略)이라는 책에서는 신윤복의 그림을 “재주나 학식에 있어 비록 단원과 현재에는 미치지 못하나, 당대의 화원들이 본보기만을 모방하던 시절에 오직 신윤복만이 현실 묘사를 주장하여 일가를 이룬 점은 최초라 아니할 수 없는 공이 있었다. 더욱이 그 유려한 선과 아담한 색채로 얻어낸 인물들은 한결같이 조선 사람의 골격과 표정을 고스란히 살려 놓았다”라는 평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 ‘미인도’와 더불어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의 풍속화들은 사대부들의 성리학적 윤리관에 반하는 ‘연애 혹은 성애의 풍속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는 1865년 마네(Edouard Manet)가 비너스 대신 밤거리의 여인을 모델로 그린 누드화 ‘올랭피아(Olympia)’에 비견되는 충격적인 그림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소년전홍(少年剪紅)’, 화첩 속 소년이 붉은 꽃을 꺾는다는 의미의 그림을 살펴보자. 장죽을 문 청년이 젊은 여인의 손목을 잡고 있고, 그 배경에 큰 괴석 하나와 백일홍 세 그루가 서 있다. 오른쪽 위에는 ‘밀엽농퇴록(密葉濃堆綠) 번지쇄전홍(繁枝碎剪紅)’, 즉 ‘빼곡한 잎엔 농염하게 푸른빛 쌓였는데 수북한 가지엔 잘게 붉은 꽃을 오려 붙였네.’라고 화제를 쓰고 낙관했다.

괴석의 모양과 여인의 모습이 너무나 흡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쑥 솟아오른 남성의 상징인 듯하기도 하다. 남녀배치를 염두에 두고 괴석의 형태와 그림 오른쪽에 있는 낮은 담의 관계를 살펴보면 음과 양의 조화로 읽히기도 한다. 참으로 대담한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그림 속 백일홍을 통해서는 이 집이 어느 정도의 부잣집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매천(梅泉) 황현에 따르면 장승업의 그림은 근대의 신품(神品)이라고 추앙받고 있어 웬만한 유력자가 아니면 소장할 수 없다고 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더불어 위창(葦滄) 오세창은 “장승업은 그림에 있어 능숙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문자를 알지 못했으나 명인의 실물 그림이나 글씨를 두루 보고 또한 한 번 본 것은 잘 기억하여 비록 몇 해가 지난 후에 보지 않고 그려도 가느다란 털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라고 평했다. 그런 장승업은 단원과 혜원을 염두에 둔 듯 “나도 원(園)이다”라는 의미로 호를 ‘오원(吾園)’이라 지었다.

오원 장승업, 서양의 명암기법 사용

장승업은 중국 화풍을 참조하여 서양의 정물화와 유사한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를 창안했다. 기명절지화는 선비의 품격을 나타내는 옛날 청동 그릇 혹은 도자기와 함께 부귀, 장수, 많은 자손 등 길상의 의미가 있는 꽃, 과일, 괴석 등을 그린 그림이다. 대표작 중 하나인 ‘백물도권(百物圖券)’을 살펴보면 특정한 의미에 부합하는 소재를 선택했다기보다는 백물, 즉 다양한 여러 길상의 의미를 담지한 소재를 보기 좋게 배치해 그렸다. 더불어서 서양화 기법인 명암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그림 오른쪽 위에 오원장승업방신라산인법(吾園張承業倣新羅山人法)이라고 써서 청나라 양주 화파 화가 화암(華嵒)을 따라 그렸음을 밝혔다.

18세기에서 19세기 선비화가 삼재에서 직업화가 삼원으로 바뀌는 시대는 상업의 발달로 도시 인구가 팽창함에 따라 사대부를 위해 봉사하던 중인(中人) 계층이 부를 축적해서 그들만의 문화 생활공간을 만들어간 시기와 일치한다. 이러한 공간을 마을을 의미하는 여항(閭巷)이라고 한다. 여항인의 주된 구성원은 기술직과 중앙 각사에 소속된 하급관리인 경아전으로 그들은 사대부만큼은 아니지만, 글공부를 한 계층이다. 직업 화가의 시대가 열린 것은 이 같은 세태로 경제적 여유가 생긴 여항인이 문화 향유자로 등장하며 그들의 미감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이제 시서화 삼절을 추구하지 않고, 그리는 이의 뜻을 중히 여기는 문인화의 사의(寫意) 정신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곧 길상의 의미를 담은 ‘민화’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장승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서화(書畫)에서 서와 화가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와중에 서양미술이 도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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