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12>

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

중년의 차이콥스키

[의학신문·일간보사] 가정교사는 그를 “유리로 만든 아이”라고 했다. 아이는 또래보다 쉽게 상처받고 자주 화를 냈으나 누구보다 정이 많고 따뜻하였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는 5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나, 그의 부모님은 그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를 원했다. 14살 때 사랑하던 어머님의 죽음을 맞이한 차이콥스키는 어머님이 살아계실 적 뜻을 받아들여 법대에 진학하여 법무부 공무원으로 일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게 된다. 결국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21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게 되고, 4년 후 영예로운 졸업과 함께 모스크바 음악원에 교수로 임용이 된다.

그의 첫 걸작인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 이후, 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에 그는 편지 한통을 받게 된다. 발신인은 부유한 미망인인 나데즈다 폰메크 부인으로, 그 내용은 그의 음악에 대한 깊은 찬사와 함께, 그에게 매달 경제적인 후원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아주 친밀한,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사이가 된다. 기이한 점은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만나기를 피했다는 것이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나데즈다 부인이 아마도 차이콥스키의 비밀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먼 발치에서만 그를 바라보았을 것이란 이야기가 있다.

제1회 입학생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위에서 말한 차이콥스키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는 동성애적 성향이 있었고, 그는 이러한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동성애적 성향이 예기치 않게 대외적으로 거론이 된 적이 있었고, 타고나기를 예민하고 여린 그는 이를 계기로 더욱 소심해져서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심각하게 꺼려하였다. 차이콥스키의 성격을 알려주는 예로는, 그가 연주 후 미지근한 관객의 반응에 충격을 받아 러시아를 떠나기도 하였고, 음악회 전에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과도하게 술을 마셨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작품을 불에 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이런 그가 유일하게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쌍둥이 동생 중 하나인 모데스트-그도 역시 동성애자-였다.

이렇게 평생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 차이콥스키 이지만, 외부에는 평범한 남자로 보이고 싶었던 갈망이 꽤나 컸다. 그리고 1877년, 그가 37살 때 그는 너무나도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안토니나와 결혼을 한 것이다.

안토니나는 학생 시절부터 차이콥스키를 무척이나 흠모했다. 차이콥스키가 모스크바 음악원에 교수로 있을 당시 학생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그녀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차후에 그녀가 쓴 편지, “존경하는 선생님, 꼭 한번 만나주세요. 물론 선생님 뜻대로 하시지만, 만나주시지 않으면 저는 자살할 거에요” 글에는 어찌된 일인지 반응을 보인다. 보통 때 같으면 냉정하게 거절을 했을테지만, 당시 그는 자신과 동생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알려질까봐 무척이나 전전긍긍했던 시기였기에 결혼을 결심했던 것이다.

불행한 결혼생활 중 걸작 두 편 완성

결혼은 처음부터 불행했다. 러시아의 이 위대한 음악가를 무척이나 사랑한다고 떠들고 다니던 안토니나는 그의 음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 역시 아내에게 조금도 애정이 없었다. 결국 결혼한지 3주 만에 차이콥스키는 집을 나와 방황하였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도 “죽음은 사람에게 최고의 축복이고, 나는 온 영혼으로 그것을 바란다”며 아내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실제로 차이콥스키는 그 무렵 과도한 신경쇠약증으로 인해 집 근처의 강가에서 자살 시도를 한다. 어찌되었든 그의 걸작 중 두 편은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결혼 전부터 작업해 왔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과 나데즈다 부인에게 헌정한 ‘교향곡 4번’이다.

더 큰 비극은 1893년, 차이콥스키 최고의 걸작인 ‘비창 교향곡’의 초연이 이루어진 10월 16일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국민작곡가로 자리를 잡은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새 작품을 지휘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그런데 공연은 실패했다. 작곡가 자신이 느꼈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완성도에 비해 관객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이런 호응에 크게 예민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후 10월 20일, 모데스트를 포함한 가까운 친구들과 얘기를 하던 중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평소와는 달리,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편안하고 낙관적으로 죽음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 모임 이후, 우리에게는 평생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떤 이들은 그가 끓이지 않은 물을 마셨다고 증언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는 것은 콜레라에 걸리겠다고 공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분명한 건 그날 밤부터 그의 배탈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동생 모데스트에 의하면, 배탈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식사자리에서 정상적인 식사는 하지 못한 채 다시 끓이지 않은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몸부림치는 고통과 함께 차이콥스키는 콜레라 확정 판단을 받게 된다. 시간이 좀 지나 한 고비는 넘긴 듯 했지만, 심각한 합병증으로 또 괴로워하다가 나흘 후인 10월 25일 새벽에 세상을 떠난다.

이 위대한 작곡가의 죽음으로 인해 러시아 전체는 충격에 휩싸이게 되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무성한 소문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비창 교향곡의 실패와 자신의 비밀 때문에 일부러 끓이지 않은 물을 마셔서 자살했다는 이야기, 혹은 어느 귀족의 조카와 애인 관계였다가 발각이 되어서 남몰래 재판을 받고 있었다는 소문 등이 그것이다.

그의 정확한 사인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분명한 사실은 있다. 그것은 내적인 갈등으로 인한 신경쇠약과 비극적인 죽음에 대항하듯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더할 나위없이 따뜻하고 격렬하고 아름답고 격정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느끼는 감정들- 자기 의심, 두려움, 공포, 외로움, 사랑, 기쁨, 환희-을 그의 음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를 알고 싶다면, 그의 음악을 접해보기를 권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내 안에 차오르는 생각들과 감정들이 결국 작곡가가 경험한 인생의 여러가지 모습들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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