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10>

조선의 18세기, 진경시대Ⅰ

[의학신문·일간보사] 앞서 근대 유럽에서 순수미술의 탄생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당시 우리 그림은 어떠했을까? 18세기 영·정조 시대는 세종대왕 이후 제2의 문예 부흥기였다. 당시 조선은 주변 국가라는 변방의식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국가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중화의식은 민족이나 지역 개념에서 벗어나 문화를 중심으로 화이(華夷)를 구별했기 때문이다.

18세기 문예 부흥기를 다른 말로 ‘우리의 참 풍경’을 의미하는 ‘진경(眞景)시대’라고도 한다. 세종대왕이 우리 말을 우리 글로 쓸 수 있게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면, 진경시대는 우리의 모습을 우리 식으로 그리고 쓰기 시작한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서예에서는 원교(圓嶠) 이광사(1705-1777)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했다. 그림에서는 삼재(三齋)라 하여 진경산수화의 겸재(謙齋) 정선(1676-1759), 풍속화의 관아재(觀我齋) 조영석(1686-1761), 그리고 중국의 남종화풍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현재(玄齋) 심사정(1707-1769)이 있다. 주목할 점은 이들 모두 문인화가였다는 것이다.

영·정조시대는 ‘제2 문예부흥기’

삼재 중에서도 정선은 화가에게 최고 상찬인 ‘화성(畫聖)’이라 일컬어지고 영조의 그림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백악, 지금의 청와대 옆 경복고등학교 근처에 살면서 인근 명문가인 안동 김씨 김창협, 김창흡 형제의 집을 드나들며 성리학과 시문을 배웠으며, 후원을 받았다. 그런데 영조 시대 최고의 시인인 이병연과 관아재도 이들과 밀접히 교류했다. 그래서 이들을 ‘백악사단(白岳詞壇)’이라고도 한다. 게다가 심사정은 소싯적에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다. 삼재는 이렇게 오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진경산수화라 하니 혹자는 서양의 풍경화처럼 경치를 그대로 재현한 그림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진경이라 함은 그림에 등장하는 산천과 인물들의 복장이 조선의 것임을 의미한다. 주역에 정통해서 당대 제일로 꼽힐 정도였던 정선은 주역의 근본원리인 음양 조화를 토대로 자연을 창의적으로 재구성하였다. 그의 그림은 중국 명나라 말 동기창이 중국 화법을 수묵에 기반한 남종화와 세밀 묘사 중심의 북종화로 양분했던 것을 한 화면에 구현한 것이다. 이를 ‘동국
진경산수화법’이라고 한다.

정선의 대표작 ‘금강전도’를 잠시 살펴보자. 정선은 그림에 금강산 일만이천봉 산세를 온전히 담아내고자 했다. 조감하듯 높은 곳에서 바라본 금강산 모든 봉우리를 동그라미 안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림 맨 아래 한가운데 장경봉부터 시작해서 만폭동을 지나 향로봉을 거쳐 맨 위에 비로봉을 배치하여 화면을 둘로 나누고, 돌산과 흙산을 서로 다른 화법으로 그려냈다. 곧 태극의 형태였다.

정선보다 십 년 연하인 관아재 조영석은 당대 인물화에서는 자신이 최고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가 정선에게“만약 만리강산을 그리게 하여 일필로 휘둘러 필력이 웅혼하고 기세가 흐르는 듯 하는 데 있어서는 제가 그대에게 미치지 못하겠지만, 터럭 하나 머리카락 하나까지 핍진하고 정교하게 그리는 데 있어서는 그대가 반드시 저에게 조금은 양보하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그림을 보고 베끼는 것은 잘못이며, 대상을 직접 보고 그려야만(郎物寫眞) 살아있는 그림이 된다며 사생을 중시했다. 그리는 이의 뜻을 중히 여기는 사대부 화가의 화론으로는 의외였다. 나아가 그는 관념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일상의 모습을 가능한 한 그대로 그리고자 했다. 그는 공재 윤두서가 개척한 풍속화를 더욱 발전시켜 양식적으로 확립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절구질’을 보자. 윤두서의 풍속화는 약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시점에서 그렸다면, 이 그림은 보통 사람 눈높이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렸다. 화면 구성 또한 파격적이다. 벽과 기둥 그리고 빨랫줄에 걸린 옷은 수직 수평으로 기하학적 느낌이난다. 그리고 나무와 절구질 하는 아낙은 사선으로 서로 교차하는 듯 보여 역동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대비된다. “관아재의 필법은 늘 신묘한 경지에 들어가니, 보는 사람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그림 왼편에 운수도인(雲水道人)이 쓴 찬문인데, 실제 그림 속 선은 대상에 따라 운동감과 절제감이 조화를 이룬다.

심사정의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153.5x61cm, 1747, 종이에 수묵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현재 심사정은 당시 화성 정선과 비교될 만큼 최고 화가였다. 일몽(一夢) 이규상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현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앙하였고, 어떤 사람은 겸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숭하였는데, 그림이 온 나라에 알려진 것도 비슷하였다”라고 당시 세간의 평을 기록했다. 그런 심사정이 지금은 대중에게 그리 회자되지 않는 것은 그가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음에도 중국 남종화풍의 관념산수화에 전념함으로써 독창성이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이다.

심사정은 왜 관념산수화에 집착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그가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한 자와 대역죄인 집안 후손이었다는 점이다. 자신이 외면당하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어디선가 스스로의 이상과 목표를 찾고자 했을 것이다. 그게 바로 관념산수화였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조선의 관념산수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다.

이 같은 진경시대의 시작은 대략 조선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기억하고 작은 중화국(小中華國)으로서 명과의 의리를 기억하는 사업을 시작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숙종은 1681년 남한산성에 그동안 청에 소문이 들어갈까 시행하지 못했던 척화 삼학사(三學士)를 기리는 사당 ‘현절사(顯節祠)’를 지었다. 숙종은 또한 명나라가 멸망한 지 60년이 되던 1704년 이를 상기하기 위해 창덕궁 금원 옆에 대보단을 건립했다. 대보단의 주된 기능은 대명 의리와 중화의식의 표상이었다. 한마디로 진경시대는 숙종대에 조선이 오랑캐에게 망한 명나라의 중화 문명을 계승하는 유일한 적통 국임을 자임하면서 막을 올려, 영·정조 시대에 그 꽃을 활짝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정조 같은 문예 군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문인화가 삼재의 시대가 지나고 화원화가인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그리고 고아 출신의 오원(吾園) 장승업, 이른바 삼원(三園) 시대가 열린다. 이런 변화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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