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9>

순수미술의 탄생

[의학신문·일간보사]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최고의 화가는 누가 뭐라 해도 렘브란트(1606-1669)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독립한 후 공화제를 채택하고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그 결과 부를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들이 미술 소비자로 새롭게 대두하였다. 더불어 유럽 최초의 신교 국가였기에 기존의 종교화 대신 그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정물화와 풍경화 등 새로운 장르의 그림이 등장했다. 이와 같은 시대 상황에서 렘브란트는 타고난 능력으로 일찍부터 초상화가로 부와 명예를 얻었다.

렘브란트의 재능과 시대상을 살필 수 있는 그림이 바로 1634년에 마르텐 솔만스와 오프옌 코피트의 결혼을 기념해 그린 초상으로, 실물 크기의 서 있는 전신 초상이다. 마르텐의 아버지는 설탕 정제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호였는데, 당시 이런 초상은 왕과 최고 관리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하지만 그는 점차 주문자의 요구에 맞지 않게 자기 뜻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결국 말년에는 그림 주문이 거의 완전히 끊겨 자화상만을 그릴 수밖에 없었고,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사실 그의 경제적 어려움은 그의 경제 개념 없는 삶도 크게 작용했다. 그렇지만 그의 생애는 한 세기 뒤 미술작품 제작과 소비가 서서히 후원자 중심에서 벗어나 시장 중심으로 전환되는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 유럽에서 미술품 생산과 소비는 후원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후원자는 다름 아닌 왕과 귀족이었으며 앞서 언급한 신흥 부르주아였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1648년 궁정 화가들과 미술애호가들이 루이 14세(1643-1715) 섭정 정부에 청원하여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Acade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가 설립하였다.

17세기엔 후원자 중심 미술품 생산

아카데미 설립 취지는 프랑스 미술이 이탈리아의 그늘에서 벗어나 보편적 법칙과 규범을 수립하고 궁극에는 예술창작의 표준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아카데미에는 두 가지 책무가 주어졌다. 하나는 길드의 장인과 구별되는 예술가들의 모임을 지향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책무를 감당하기 위해 정례적으로 강연회가 개최됐다.

예술가들은 강연을 통해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분석하고, 논의하여 회화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언술 능력을 증진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들은 길드에 소속된 장인의 지위를 벗어나 그들의 후원자인 왕실 귀족과 여러 분야의 학자들과 직접 지적인 소통을 하고자 했다. 이런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장르가 역사를 소재로 한 역사화(歷史畵)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역사화를 최고의 장르로 선정한 이유는 회화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문학처럼 알레고리적인 구성을 통해 교훈적인 내용을 담아내야 한다는 견해가 반영된 것이다.

그 역사화의 본보기로 강연에서 논의된 작품 중 하나가 동시대 작가 니콜라이 푸생(1594-1665)이 그린『만나, 사막에서 신비의 양식을 얻는 이스라엘인들』이다. 이 그림은 성경에서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신비의 양식인 만나를 먹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푸생은 화면 가운데 손을 들고 있는 모세를 중심으로 좌측은 만나를 얻기 전 굶주린 상황을 묘사했고, 우측에는 만나를 먹고 난 후의 상황을 그렸다. 더불어 그림의 배경은 만나의 기적이 일어난 장소가 어떠한 곳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이 분석 대상이 된 주요 이유는, 그림이 문학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 이야기의 맥락을 온전히 담아 그 가치를 전달해야 함을 강조하는 데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1737년부터 아카데미 회원전인 살롱전이 매년 개최되어 다양한 관람객의 호응을 얻었다. 이 전시는 완전히 세속적인 환경에서 동시대 미술품이 자유롭게 전시되고, 정기적으로 반복해서 열린 최초의 전시였다. 미술 전시회를 찾는 중산층 관람객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대중적 미술관 개념으로 발전했다. 예컨대 18세기 중반 이후 유럽 왕실 소장품 중 일부분이 공개되기 시작했으며,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후 4년이 지나 루브르 박물관이 최초의 공공미술관으로 개관했다. 미술관에 수집된 작품이 전시되면서 작품 본래의 기능은 잊히고 자율적인 관조의 대상이 되었다. 이 같은 과정에서 회화와 조각은 단순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기계적인 예술이 아니라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는 Beaux-Arts, 즉 ‘아름다운 예술’로 분류됐다.

영국에서는 Beaux-Arts를 Fine Arts, 곧 ‘순수한 미술’로 번역했다. 1803년 프랑스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도 명칭이 ‘미술아카데미(Academie des Beaux-Arts)’로 바뀌었다.

프랑스혁명 후 시장 중심으로 전환

1789년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난 후 미술품 생산과 소비 행태는 과거 후원자들이었던 왕실과 혈통 귀족이 몰락하며 시장 중심으로 급격하게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는 작가로서의 독립성과 대중의 인정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졌다. 왜냐하면 작가는 미리 작품을 제작한 후 화랑을 통해 ‘익명의 구매자’에게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면은 작가가 창조성에 기반한 창작의 자유를 성취한 점이다. 문제는 익명의 구매자로 대두된 재력가가 바로 교양 없는 상층 부르주아로, 부를 통해 관료로 상승한 신흥귀족 이른바 법복귀족(法服貴族)이었다.

그들의 민낯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 장 앙투완 와토(1684-1721)가 1721년에 그린『제르생의 간판』이다. 이 작품은 친구인 제르생의 화랑을 장식하기 위해 그가 죽기 직전에 그려준 풍자화다. 그림 좌측에는 분홍색 복장의 여성이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점원들이 상자에 담고 있는 모습을 힐긋 쳐다보면서 우아하게 남자의 도움을 받으며 들어오고 있다. 이는 루이 14세 시대가 지나갔음을 의미한다. 오른쪽에는 교양이 부족한 듯 보이는 한 쌍의 남녀가 오페라 안경을 쓰고 여성 누드화를 코앞에서 세밀히 살피면서 화상(아마도 주인인 제르생)의 그림 설명을 듣고 있다. 그 옆에는 한 여인(아마도 제르생의 부인)이 소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는 세명의 남녀가 있다. 그런데 그들의 성의 없는 모습으로 봐서 세 명 모두 설명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화가 즉, 미술품 생산자가 이 같은 소비자를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를 타개하기 위해 화가는 창조성을 중시하며 시장 현실로부터 격리된 ‘순수한 미술’(Fine Arts)을 추구했다.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는 “돈에 대해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예술은 계속 이행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순수미술은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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