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7>

원근법·유화, 르네상스시대 최고 발명품

[의학신문·일간보사] 지난 밸런타인데이에 폼페이 유적지구 V구역에 있는 저택 안마당으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프레스코(fresco) 그림이 발견됐다. 그리스 신화 『나르키소스』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이천 년 전 그림이라 하기에는 상태가 대단히 양호하며, 명암법과 원근법이 적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은 그레코로만(Greco-Roman) 양식, 즉 그리스 영향을 받은 로마의 그림이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인들도 그러한 착시효과를 그림에 활용했을까? 실제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헬레니즘 말기부터 그림에 명암법과 원근법을 사용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기독교 중심의 중세 천 년간 유럽인들은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나,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으로 퍼진 르네상스 시기에 다시 그려지기 시작했다. 르네상스란 부활, 재생을 의미하는 바와 같이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재발견과 함께 로마 후마니타스 전통에서 비롯된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다시 인간 중심에서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한 14세기부터 17세기의 문화 현상을 일컫는다.

서양미술사에서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혁신적인 발명품 두 가지를 꼽으라면 ‘원근법’과 ‘유화’다. 알프스 이남에서 원근법이 발명되었다면, 알프스 이북에서는 유화 가 등장했다. 원근법은 피렌체 두오모 성당 돔을 설계한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브르넬레스키(1377~1446)가 기하학적인 원리를 적용한 선원근법을 고안했다. 유화는 네덜란드의 얀 반아이크(1390?~1441)가 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두 15세기의 일이다.

원근법 발명으로 여러 시점을 혼합한 중세의 화법과 단절하고 관찰자, 즉 화가의 시점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화가들은 원근법이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현실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함이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여겼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일기가 이를 입증한다. 그는 “예술을 통해 우리는 신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 … 인간과 짐승을 모두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실제 사물에 근접한 그림을 보지 않았는가?”라고 썼다. 한마디로 원근법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더불어 “원근법을 사용한 모든 소묘나 회화는 관객에게 그가 곧 세계의 중심이라고 알려준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과학의 시대를 거치며 19세기 사진술이 발명되는 데 촉매 역할을 했다. 따라서 카메라는 원근법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한 기계장치라고 할 수 있다. 1839년 프랑스에서 사진술이 공인된 이후 그림이 수 만 년 독점해 온 ‘기록의 기능’을 상실하자 위기감을 느낀 화가들은 도대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림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통해 깊은 회의에 빠졌다.

20세기부터 그림 주관적으로 표현

모네를 필두로 인상파 화가들이 실제 눈으로 보는 경험과 색채학 이론을 참고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세잔느와 피카소 같은 입체파 화가가 원근법에 반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고는 마침내 20세기 들어서며 형상이 사라지고 오로지 점·선·면과 색채로만 그린 완전한 추상화가 등장했다. 그림이 객관적인 재현에서 주관적인 표현으로 바뀐 것이다.

한편 유화 이전에는 템페라(tempera)기법으로 그렸다. 이 기법은 안료를 달걀노른자에 갠 물감으로 그리는 방법인데, 노른자가 빨리 마르기에 서둘러 그려야만 했다. 더욱이 불투명 수채화처럼 색채가 겹치면 탁해지는 특성이 있어서 음영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없었고, 수정도 여의치 않았다. 이런 연유로 템페라 기법으로 그리기 위해서는 정확한 밑그림과 단계별 정밀도가 필수적이었다. 유화의 발명으로 이런 단점을 극복할 수 있게 됐다.

유화는 마르면서 형성된 투명한 기름막 속에 안료가 분포되어 빛이 그 막을 통과하면 바탕색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런 원리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고도 풍부한 음영효과와 함께 정밀한 묘사가 가능해졌다. 특히 유화는 페인트막의 원래 형태를 유지하면서 고쳐 그리는 부분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수정하기가 수월해졌다. 그래서 밑그림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지금까지 개발된 어떤 물감도 빛의 묘사만큼은 유화에 필적할 수 없으며, 유화는 서구미술이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그리는 작업이 수공예적인 치밀함에서 점차 자유로운 사고의 반영으로 변해갔다.” 장인에서 작가로 사회적 위상의 변화가 서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한편 천으로 된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는 방법도 등장했다. 캔버스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이전에 사용되던 나무 패널보다 저렴하고 가볍다는 점이다. 또한 무게가 가벼워서 그만큼 운송이 수월해졌고, 크기의 제약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캔버스에 그린 유화는 “영감과 착상을 중시하는 화가들에게 중요한 표현매체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작품도 상품과 같이 매매가 가능해졌다.

이 모든 변화의 동력을 제공한 것은 바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다. 당시 상황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들은 향신료와 더불어 해외에서 생산된 화려한 색채의 안료를 접했다. 그렇게 색채에 대한 안목을 키운 그들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며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행위로 성당을 봉헌하거나 제단화를 봉헌했다. 또한 값비싼 수입 안료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미감으로 부를 포장하여 과시했다.

신흥 부자인 상인들은 주문자요, 화가들은 주문생산자이다. 서양미술사에서 화가가 주문생산자의 지위를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8세기 혁명의 시대라 불릴 만큼 정치 경제적으로 급변하던 시기에 순수미술이라는 개념이 대두되면서부터다. 그러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미술시장이 형성된 이래 주문자는 불특정 소비자로 주문생산자는 생산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점이 생산자이며 소비자였던 선비들의 그림, 즉 대상의 재현보다는 사의(寫意), 즉 그림 그리는 이의 뜻을 중히 여겼던 문인화 전통의 동아시아 그림과 가장 큰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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