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8>

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

요한 세바스챤 바흐 (1685-1750)

[의학신문·일간보사] 조상부터 대대로 음악에 관련된 일을 하는 가문이 있다. 오르간, 피리,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악기 제조업자, 교회 합창단장, 궁정음악가 등의 일로 주업을 삼았던 이 가문의 후손들은 1580년 이후 독일의 튀링겐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 지방의 중심지인 아이제나흐 도시에서 1685년 3월, 후대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음악가인 요한 세바스챤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탄생한다.

바흐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고 말해야 할까. 그의 가족은 항상 적은 수입으로 인해 궁핍했고, 그의 형제들은 그가 어린 시절 네 명이나 잇달아 죽게된다. 하지만 가족들은 고통의 시간들을 음악으로 위로하였고,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그들의 뛰어난 음악 연주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바흐가 9살 때 그는 부모님을 잇달아 잃게 되고, 곧 자신의 밥벌이를 하기 위하여 10살 때부터 학교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보수를 받아 생활하면서 정통 루터교에 깊이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는 아마도 어릴 적부터 가족의 연이은 죽음과 가난의 경험을 통해 삶의 만만치 않은 무게를 일찍이 깨달았고, 죽음이 끝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종교의 가르침은 그에게 구세주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당시 루터교에서는 14세를 성인으로 간주하여서 그런 것인지, 바흐는 자신이 14세가 되던 해에 독립을 하기 위해 350km나 떨어진 뤼네부르크 성 미카엘 교회 성가대에 지원을 하게 된다. 어려운 생활고로 성 미카엘 학교를 졸업한 후에 대학진입은 전혀 생각조차 못하고 자신의 재능이자 생계수단이었던 음악을 통해 일을 찾게 된 바흐.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와 오르가니스트로 일을 하게 된다. 오르간 연주를 하면서 그는 독일의 오르가니스트인 벅스테후데(Buxtehude)의 음악, 특히 신자들이 부르기 쉽도록 작곡된 루터파 교회의 찬송가인 코랄에서 큰 감명을 받게 되어, 이를 본받아 오르간의 손건반과 발건반의 모든 음을 이용하여 화려한 즉흥연주를 시도하게 된다. 바흐에게 평생에 걸친 소명은 진정한 종교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이었고 편파적이었던 교회 장로회로부터 “이상한 화음을 결합해 신도들을 혼란스럽게” 한다며 격렬한 비판을 받는다.

‘하나님 찬양-이웃 사랑’ 음악에 담아

바흐

온화하지만 고집이 세었던 바흐는 지속되는 갈등과 참견에 분노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된다. 그는 곧 이어 바이마르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 정착을 하게 된다. 종교와 음악을 무척이나 중요시 하였던 바이마르의 에르스텐 공 덕분에 바흐는 자유롭게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매달 새로운 칸타타를 작곡하여 연주하였고, 무엇보다 그가 깊이 관심 있었던 교육을 위한 <오르간 소품집>을 만들게 된다. 그의 소신은 분명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찬양을, 가까운 이들에게는 가르침을” 그는 신의 섭리를 음악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고, 자신의 재능과 지혜를 아낌없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기를 원했다. 그 후 예기치 않았던 에르스텐 공과의 불화로 바흐는 서둘러 쾨텐으로 이주하게 된다.

쾨덴에서 바흐는 자유로운 계몽주의자였던 레오폴트 공의 영향으로 바흐가 소명으로 여기는 종교음악보다는 세속적인 궁정음악을 더 많이 연주하면서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다소 아이러닉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음악이란- 종교적이나 세속적이나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일 뿐이었다. 그 곳에서 그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근엄한 바흐였지만 항상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넘쳤고, 아이들로 북적거리는 생활은 그의 음악 창작에 도움이 되었다. 이토록 풍요롭고 평화로운 그의 삶에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바흐를 큰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자녀들을 생각하여 당시 20살이었던 안나 막달레나와 곧 재혼을 하게 되며, 다시 종교음악에 몰두하기 위하여 라이프리치로 떠나게 된다.

바흐가 남은 여생을 보내었던 라이프치히는 권위 있는 대학 도시이자 음악의 중심지였고, 그가 맡은 성 토마스 학교의 칸토르의 역할은 악장의 임무와 도시의 모든 교회들을 총괄하는 음악감독이라는 막중한 책임이 요구되는 자리었다. 하지만 가난한 계층의 학교였던 성 토마스 학교는 교육환경이 심히 열악했고, 학생들은 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 합창을 하러 나가야 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학교 위원회는 바흐의 실력이나 명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3년 동안은 계약한 봉급을 재대로 지급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양의 일을 그에게 전가하였다. 그러나 바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면서 매주 예배를 위한 칸타타, 성 금요일을 위한 수난곡, 장례식을 위한 모테트 등을 쉴새없이 작곡하면서 자신의 의무를 넉넉히 감당하였다. 자신의 가치를 재대로 알아봐주지 않는 이 곳에서 바흐는 꿋꿋히 창조의 불을 태우며 자신의 소명을 지켜나간 것이다. 그리하여 1792년, 무려 세시간이나 되는 대장정 합창곡인 <마태수난곡>을 드디어 초연하였고, 작곡가의 기대와는 달리 사람들은 지나치게 웅장하고 극적이라며 심한 비난을 쏟아내었다.

천재 작곡가 바흐 작품 ‘S.G.D’ 새겨

그로부터 몇 년 후, 함부르크에서 창간된 <음악비평>이라는 잡지에 바흐에 대한 대외적인 비평 -“그의 곡이 좀 더 경쾌했더라면, 덜 과장되고 덜 인위적이면서 좀 더 단순하고 자연스러웠다면 이 위대한 인물은 세상에서 최고의 작곡가가 되었을 것이다”- 이 실리면서 바흐의 음악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지속되다가, 바흐가 사망한 이후 후대의 작곡가들로부터 그 탁월함이 재발견 되어서야 비로소 잠잠해졌다. 바흐가 지금은 가장 위대한 음악인으로 일컬어지나, 살아 생전이나 사망 직후에는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아마도 그의 작품 중 가장 웅장하고 뛰어난 예술작품인 <마태 수난곡>은 초연 이후 단 한번도 연주되지 않았으나, 100년 후에 멘델스존에 위해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되면서 종교음악의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바흐는 시대의 무관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의 남은 가족들 마저 바흐의 죽음 이후 힘겨운 생활고로 작곡가의 악보를 모두 팔아 넘기면서 겨우겨우 삶을 유지해 나아갔다고 한다. 수많은 인생의 질고를 지나 자신의 소신을 지켜온 고귀한 인격의 천재 작곡가의 인생을 돌아보니, 결코 찬란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오히려 더 많은 어둠과 아픔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에 남겨진 S. G. D 라는 세 개의 문자는 그의 음악을 접하는 모두에게 자신이 평생 지니고 온 마음을 전달하는 듯 하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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