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7>

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

중년의 드보르작

[의학신문·일간보사] 1841년 9월,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시골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이 곳은 프라하에서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몰다우 강의 강둑에 오밀조밀 모여 형성된 넬라호제베스라는 마을이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푸줏간 겸 여관을 운영하는 상인이었고 외가와 친가 모두 농사를 짓고 살아온 집안이었다. 아이는 태어난 다음 날 푸줏간 건너편에 있는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매주 미사에 참석하는, 신앙심 깊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평생 살게 된다. 이 마을의 여관집 아들은 늘 그곳을 오가면서 다양한 민요 가락을 접하게 되고, 주일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열었다. 그들은 악기를 쥐고 노래를 하며 춤을 추었고, 아이는 당시 배운 깽깽이로 마을 악단에 힘을 보태었다. 모든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드보르작, 자신의 뿌리에 자부심 커

이 체코의 소박한 시골 아이가 바로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인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이다. 그는 평생 스스로의 뿌리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명성을 떨친 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배경이 같은 촌부들 사이에 있을 때 가장 편하다고 했다. 그가 민중의 정서를 완전히 이해해서 그런 것일까? 드보르작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음악을 쓰기 원했다. 대중적이면서 지적인 그의 음악에서는 따사로운 햇살과도 같은 찬란함이 느껴지고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스러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어느 저자는 말한다. “(그의 음악에서는) 웃음과 눈물, 슬픔과 흥겨움, 양극단 사이에 놓인 수많은 분위기가 병존하는 작품이다. 그는 완벽에 가까운 솜씨를 부려, 폭넓고 다양한 악기의 색채 법을 발휘하고…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세상에 알려진 이후 동시대 작곡가들 중 가장 유명하고 사랑 받는 위치에 있었던 드보르작이었지만, 그의 삶이 처음부터 찬란했던 것은 아니다. 가난한 푸줏간의 아들에게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던 길이었지만, 결국 주변의 권유와 도움으로 음악의 길을 가게 된 드보르작. 하
지만 프라하 오르간 학교를 2등으로 졸업한 그에게는 길고 긴 좌절과 실패의 기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졸업 후 그는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하여 댄스 밴드에서 비올라 주자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 도시 근처의 식당과 무도회장에서 폴카나 메들리 따위를 연주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해 나간 것이다. 3년 후에는 민족주의자들의 문화운동을 대표하는 국립극장에서 수석 비올라 단원으로 활동을 하게 되지만 수입은 보잘것 없었다.

낮엔 악단서 생활비 벌고 밤에 작곡

그러나 그에게는 아주 가까운 극소수의 친구들만 아는 비밀이 있었다. 낮에는 악단에서 생활비를 벌면서 밤에는 쉬지 않고 작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실내악곡, 교향곡, 가곡, 오페라 등 스스로의 역량에 도전하면서 누구보다 엄격한 잣대로 작품을 만들어 나아갔다. 수년간은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작품들을 불살라 버리기도 했을 만큼 신중하게 완벽함을 추구해 나아갔다.

1871년, 드보르작이 30살 되던 해에 드디어 세상에 자신이 작곡가로써 곡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곧 이어 지난 12년 동안 밥벌이를 해왔던 비올라 단원직을 내려놓는다. 아마도 스스로 인생의 크나큰 승부수를 던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가 당시 쓴 신작 오페라 ‘왕과 숯굽는 사람’은 1872년에 처음으로 대규모 청중에게 선을 보이게 되고, 같은 해 6월에는 체코 민족주의의 정신을 열렬히 간구하는 애국적 칸타타인 ‘찬가: 백산의 후계자들’의 초연을 대성공으로 마치게 됨으로써 아무도 모르던 무명 작곡가의 위상은 치솟게 된다. 긴 시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였을까. 곧 그에게는 만남의 축복이 찾아온다. 이미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전역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던 브람스가 드보르작의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것이다. 브람스는 “음악가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것들을 드보르작이 가지고 있다”며 드보르작을 극찬하였고, 드보르작의 명성을 유럽 전체와 그 너머까지 전파하기 위하여 자신의 출판업자에게 소개시켜 준다. 출판업자인 짐로크와의 만남을 토대로 곧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슬라브 춤곡’이 탄생하게 된다. 드보르작은 ‘슬라브 춤곡’에서 “민족적 선율과 민요들에서 두드러지는 국민성을 고스란히 음악으로 옮긴다”는 자신의 소명을 반영하였다.

이 작품을 발견한 베를린의 어느 음악 평론가의 말이다. “여기에 마침내 백 퍼센트짜리 재능이 등장했다. 그의 음악에는 천상에서 내려온 것만 같은 자연스러움이 흐르고 있고… 임의로 꾸민 흔적도, 억지로 가두어 놓은 흔적도 전혀 없다. 우리 앞에 놓인 건 민요 가락 조각을 얼기설기 이어 붙인 작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벽의 경지에 이른 예술이다…대로에 떨어져 있는 보석을 주운 사람은 그 물건을 누군가에게 신고해야만 할 의무가 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로 그러한 신고를 하는 것이다.”

평생 스스로에 엄격하고 겸손함 유지

브람스와 평론가의 리뷰 덕에 중년의 드보르작은 유럽 전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의 인기는 치솟았고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작곡가가 50살이 된 1891년은 그의 인생에 최고의 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여러 번 제안을 받았던 프라하 음악원 교수직을 드디어 수락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미국 국립음악원장직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제안받게 된다. 이처럼 떠들썩한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드보르작은 침착하게 자신의 작곡에 몰두하며 끝까지 소명을 완수하는 인생을 산다. 자신의 뜨거운 조국애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재능과 항상 스스로에게 엄격하며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작곡가 드보르작은 말한다.

“오늘 찬사를 받은 작품일지라도 내일이 되면 조롱을 받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이는 내가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우쭐대며 자만심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다만 진실한 마음으로 곡을 쓰며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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