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5>

[의학신문·일간보사] 누군가 임종을 맞고 있다. 의사가 맥을 짚고 있고, 그 옆에서 아내가 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 뒤에는 직업적인 이유로 오게 된 기자와 우연히 끼어들게 된 화가가 서 있다. 그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한 사람의 최후를 목격하고 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trega y Gasset)의 저서 ‘예술의 비인간화’ 첫 페이지에 펼쳐진 상황이다.

아마도 그들은 서로의 직업 때문에, 그 죽음에 대한 목격담은 크게 다를 수 있다.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가 말한 것과 같이 관점이 대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본 것을 재현하는 그림도 이와 같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양과 서양에는 그림에 대한 매우 비슷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로마 시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23-79)가 쓴 ‘박물지(Naturalis Historia)’에는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에 두 명의 내로라하는 화가, 제욱시스(Zeuxis)와 파라시오스(Parrhasios)의 그림 대결 이야기가 전해온다. 두 경쟁자는 누가 더 그림을 잘 그리는지 경쟁했다. 제욱시스는 ‘포도’ 그림을 출품하였고, 파라시오스는 ‘커튼’ 그림을 출품하였다. 그런데 새들이 제욱시스의 그림 속 포도를 진짜 포도로 알고 쪼아 먹으려 했다. 한껏 의기양양해진 제욱시스는 승리를 확신하며 파라시오스에게 거만하게 커튼을 걷어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보여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커튼은 그림이었다. 그 순간 그는 화가인 자신을 속인 파라시오스에게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삼국사기’에 전해오는 신라의 화가 솔거(率居) 이야기도 이와 매우 비슷하다. 솔거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어서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림을 매우 잘 그렸다.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줄기는 비늘처럼 터져 주름지었고, 가지와 잎이 얼기설기 서리어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들이 가끔 바라보고 날아들었다가 벽에 부딪혀 허둥거리다가 떨어지곤 하였다. 그린 지 오래돼 색이 바래자, 그 절의 스님이 그림을 보수했더니 새들이 더는 날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두 이야기를 통해 동양과 서양 모두는 그림이 어떤 대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함에도 서로 다른 관점에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서로 중요시했던 그림 장르와 특정 장르의 출현 시기가 크게 다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산수화’와 ‘풍경화’ 이다.

중국의 산수화와 서양의 풍경화

중국에서 풍경화라 할 수 있는 산수화의 이론은 대략 4~6세기경, 위진남북조 시대에 등장했다. 그중 가장 오래된 산수화론은 종병(宗炳 375~443)이 쓴 ‘화산수서(畵山水敍)’이다. 그는 젊은 시절 돌아다녔던 산수를 노년에 그려 벽에 걸어 놓고 ‘와유(臥遊)’, 즉 누워서 유람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때는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와 같은 현실을 탈피하고자 하는 열망이 지식계층 사이에 만연하였다. 이는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대변되는 청담(淸淡) 사상이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고, 산수화는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산수화에는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산수관(山水觀)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특히 문인들이 그리기 시작한 산수화는 산수 문학에서 출발하였다.

안견, 몽유도원도, 비단에 수묵담채, 38.7×106.5㎝, 1447, 일본 텐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서양에서 풍경화는 자연 정경이 주 대상이 된 그림을 말한다. 바라보는 주체가 있어야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서구에서 풍경화의 등장은 자연을 관찰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며 등장했다. 결국 인간 중심의 자연관이 대두되기 시작한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을 통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풍경화는 주목받는 장르가 되었다.

왜 동양과 서양에서 자연 정경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데 이렇게 오랜 시차가 있는 것일까? 서로 다른 환경에서 비롯된 관점의 차이가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자연 정경 그림 관점 달라 차이

Claude Lorrain, Seaport at sunset, Oil on canvas, 103×131cm, 1639,
The National Gallery 소장, 출처: 위키미디어

서양문화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개인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보았다.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으로 논쟁을 중시했다. 그리고 각자의 운명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철학은 개별 사물을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아 사물의 속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철학의 과제는 사물 고유의 특성을 파악해 범주화하여, 그 범주의 보편적인 규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중국인들은 인간을 사회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 조화라고 생각했다. 철학의 목표는 진리의 발견보다는 도(道)의 추구였다. 그래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추상적인 사고는 무의미하다고 봤다. 특히 어떤 대상을 전체 맥락에서 떼어내 따로 분석하는 일에 거부감을 느꼈다.

Vincent van Gogh, Starry Night on the Rhone, Oil on Canvas, 72×92cm, 1888,
Musée d’ Orsay 소장, 출처: 위키미디어

이와 같은 관점의 차이는 자연 정경을 재현함에도 영향을 미쳤다. 종병이 젊은 시절 산하를 방랑할 때 고양되었던 정신의 감흥을 노년에 다시 체험하고자 기억을 토대로 그려 벽에 걸고는 누워서 감상하였다는 일화와 같이 산수화는 보이는 그대로의 재현에 관심이 없었다. 그 보다는 그 감흥의 기억 전부를 담아내고자 했다. 결국 그림에 움직이는 시점이 적용되었다. 그림은 필연적으로 가로 혹은 세로로 길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개체의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전체가 중요하다.

‘풍경화’는 이와 달리 전개되었다. 인간 중심의 자연관이 반영된 재현방법이 선형 원근법이다. 이는 2차원 평면에 기하학 원리를 적용한 것으로, 관찰자인 화가의 시점을 중심으로 가상의 소실점을 상정하여 각각의 사물에 비례를 엄격하게 맞추고, 명암법을 가미하여 3차원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화폭에 담는 풍경은 마치 사진가가 뷰파인더로 보며 결정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자연관을 바탕으로 각자 선택한 재현방식을 오랜 시간 이어왔다. 17세기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화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전래되며, 동양화에 서양화 기법이 녹아 들어갔다. 역으로 19세기에는 서양화 기법이 가미된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가 서양에 전래 되어 인상파 미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동양과 서양은 그림 그리는 재료가 달랐기에 서로 다른 미학을 추구하였음을 또한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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