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준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스마트헬스분과장

[의학신문·일간보사] 세계 최고의 의료기기전시회로 불리는 ‘메디카(MEDICA)’ 전시회가 얼마 전에 독일에서 개최되었다. 최근 들어 인터넷의 발달과 신흥 전시회의 성장 등으로 인하여, 실제 참가업체와 방문 바이어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현재 실제 규모 면에서는 세계 최대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전통이나 상징성 측면에서는 아직까지도 세계 최고의 전시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우리나라 의료기기 제품의 위상 또한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의 방향은 메디카 전시회를 참가해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10여년 전에 메디카 전시회 부스를 방문했던 바이어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들은 흔히 제품을 △선진국의 메이저사 제품군 △중국산으로 대변되는 싸기만 한 제품군 △품질은 메이저사 제품과 견줄만하지만 가격경쟁력이 있는 제품군 3등급으로 나누곤 했다. 우리나라 제품은 세 번째로 품질은 괜찮으면서 가격경쟁력이 있는 제품군에 주로 속해 있었고, 많은 바이어들의 러브콜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바이어들이 제품을 ‘메이저사 제품과 나머지’ 두 그룹으로 나누곤 한다. 그만큼 이제 제품의 품질 차이가 적어 졌다는 얘기이다. 또한 우리나라 제품이 중국산 등에 비해서 특별히 경쟁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의료기기업계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심지어 ‘제조업은 아예 접어야 한다’고 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가서는 우리나라 의료기기산업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길로 가야할까?

스타트업들이 많이 보는 경영 관련 서적의 한 곳에서는 ‘유니콘이 되려면 독점을 해야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다른 경영 서적에서는 독점에는 △기술에 의한 독점 △마케팅에 의한 독점 △시장 규모에 의한 독점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언급한다. 솔직히 이러한 경영 서적의 내용을 들추지 않더라도 우리는 현재의 타개책을 기술적인 측면과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파괴적인 혁신 요구= 먼저 기술적인 측면을 본다면, 소위 말하는 “파괴적인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이루어야 한다.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기술적인 성과를 이루어내야 한다. 의료기기 분야에서의 파괴적인 혁신은 어떤 것일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는 어렵지만, 그 한 가지 사례를 필자는 경험한 바 있다. 1년쯤 전에 운이 좋게도, 글로벌 기업의 의료기기분야 자회사를 견학한 적이 있다. 의료기기 분야에서 거의 20년 정도 있다 보니, 웬만한 개발 프로젝트는 슬쩍 보아도 대강의 견적이 나온다. 개발 기간이나 비용, 인허가 과정, 전체 상용화 과정에서 어려운 단계 등. 그런데 방문했던 그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은 단 하나도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개발이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개발 기간도 최소 3~4년에서 길게는 10년 이상이 필요한 아이템들이었다. 그러나 성공만 한다면, 그 분야에서 시장의 판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엔지니어의 관점에서는 진심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아이템들이었다. 개발하는 아이템들은 하나하나가 도전적인 아이템들이었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실패 가능성과 개발의 어려움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근무 환경은 대기업 수준 이상이었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하지 못할까’ 하는 부끄러움이 들었다. 이미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설 자리가 좁아진 상태에서, 기술을 선도하고 있는 선진국 메이저사의 파괴적 혁신마저 나타난다면, 우리는 절대로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대기업·국가 대규모 투자 필요=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투자 측면에서는 대기업과 국가의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 파괴적인 혁신을 장려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필요하고, 혁신적인 제품이 나왔을 때 시장에 빨리 안착시킬 수 있는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하겠다.

이 정도 수준의 파괴적인 혁신은 우리나라 의료기기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세한 중소기업에서는 진행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남들보다 약간 더 좋은 제품을 빨리 시장에 내놓아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속도전이다. 예전과는 달리, 점점 의료기기의 수명이 짧아지고 있다. 특히, IT와 접목된 융합형 의료기기의 수명은 일반 IT 기기의 수명을 따라가고 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스마트폰의 수명이 2~3년이듯이, 의료기기의 수명도 수 년 밖에 안 되는 시기가 올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알다시피 조금만 새로운 제품을 만들면 인허가 등의 규제를 통과하는 시간만 2~3년이 지나간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인허가를 받고 시장에 내놓을 때가 되면, 개발 당시엔 약간 더 좋은 제품이었던 물건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지는 제품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의료기기산업의 속도전이 시작된 지금의 시대에서는 글로벌 트렌드인 속도전에 걸맞는 규제 개선이 필요하다.

최근 신문지상이나 여러 곳에서 이슈화되고 있는 네거티브 규제가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글로벌 의료기기산업 전체의 동향을 바라볼 때, 어느 쪽이 현재의 트렌드를 좇아가는데 더 유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본다.

이 분야의 모든 사람들이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정확히 직시하고, 각각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짧게는 눈앞의 단기적인 목표, 길게는 십년 이상을 바라보는 장기적인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면, 선진국의 위치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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