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태
고려대학교 소아청소년과 교수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요즘 한의계가 주장하는 것 중 하나가 ‘우리도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다. 한의과대학의 교육과정이 의과대학 교육과정과 70% 동일하다. 그러므로 현대의료기기 사용이 허가 되어야 한다’이다. 정치가의 계산적 안목, 법관의 무지의 눈, 보건관련 공무원의 편의주의 발상에서 보면 그럴듯해 보이는 모양이다.

그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것이 정의인 세상이 된지 오래 되었으니 옳은 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와 밥그릇 지키기라고 욕을 한다고 해도 일일이 대꾸하기 어려운 세태다. 그럼에도 우리가 직업이 의사인데 국민건강이란 차원에서 한번 짚어보고 넘어가야 하지는 않을까?

일반적으로 대학교에는 문과대학이란 단과대학이 존재하고, 그 안에 어문학부가 있고, 어문학부에는 국문학과, 영문학과, 불문학과, 스페인어학과, 독일어학과, 러시아어학과, 일어학과, 중문학과 등 세계의 중요 언어를 가르치는 학과가 존재한다. 그들의 교육과정을 보면 전공언어, 부전공언어를 빼면 대학 4년간 배우는 다른 과목은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상당수의 학생들이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임용고시를 통과하면 교사가 되어 정식으로 학생을 가르칠 수 있게 된다.

이 때 만약 국문과 임용고시가 다른 과목보다 쉽다고 하여 독문과 출신도 일문과 출신도 국어를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하면 이들을 채용하는 학교가 있겠는가? 대학 다니면서 어문학에 대해 어슷비슷 배웠으니 그래도 된다고 수긍하는 학부모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일들이 실제로 현실에서는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반대로 세상이 바뀌어서 어느 날 갑자기 많은 스페인어, 독일어 선생님이 필요하면, 국어 가르치던 교사에게 어차피 언어는 다 똑 같으니 당신이 가르쳐도 되지 않겠냐고 한다면 이것은 합리적인 일인가?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자기들 생명에 심각하게 관련된 문제를 놓고, 같은 대학도 아니고 같은 학부도 아니고, 학문의 뿌리부터 다른 한의학을 전공한 한의사가 의사들이 사용하는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괜찮다고 하는가? 의사라는 두 글자가 같다고 우기는 것인가? 그런 직업은 한의사 이외에 치과의사도, 수의사도 있다.

의료법에 의료인으로 다섯 가지 직군을 묶어둔 것은 비슷해 보이는 일을 해도 서로가 분명히 다른 직군이라는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함이다.

그 경계가 무너지면 의료시스템의 혼란이 가중되고, 그 결과는 국민 건강에 악영향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

의사가 침놓고, 부황 뜨고, 한약 처방을 내면 뭐라고 할 것인지 궁금하다. 한 때 약사가 한약을 조제하던 문제를 놓고 한의사와 약사들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적이 있었다. 이로부터 약사들에게 제한적으로 자격을 부여했던 한약조제사 시험이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아집 때문에 결국 한약사라는 직군만 하나 더 만드는 결과만 낳았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의료’는 할 수 있는 것과 올바르게 하는 것 사이에 국민의 건강과 생명이 달려있다.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문제에 관한한 위정자와 행정가, 국민 모두 이 점을 명심해야 될 일이다. 자칫 그 강을 건너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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