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
명이비인후과원장 ·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의사가 환자를 돌보고 치료하는 전문가로서 지녀야 할 특성은 이타심(altruism), 존중(respect), 정직(honesty), 인격적 통합성(integrity), 충실(dutifulness), 명예(honour), 탁월함(excellence) 그리고 책무(accountability) 등이 있다. 이런 의학 전문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 특성들은 의사가 사회로부터 독점적으로 의술을 행하는 권한을 인정받는 근거를 제공한다.

시대상(時代相)과 의과학의 발전에 따라 의사집단은 의학의 본질을 잃지 않기 위해 필요한 특성들을 도입하여 발전시켜왔다. 히포크라테스시대에는 소명 받은 전문직이 가져야 할 고상한 덕목들이 주된 내용이었고, 산업혁명 이후 시대에는 상업화로부터 전문직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주로 담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시대에는 환자 권리 보호와 생명윤리에 관심이 높아지고 증거 중심의학(EBM)이 강조되었고,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환자 중심적 의료를 통해 환자 권리 보장에 대한 부분이 한층 강조되었다.

하지만 최근 이런 형태의 의학 전문직업성 특성들을 더 이상 의사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불만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급기야 사회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 의사의 전문영역까지 간섭하려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의료계 오피니언 리더들과 깨어있는 의사들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은 현재 의료가 환자의 이익을 우선하는 ‘전통적인 책무들’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으며, 사회와 맺은 사회 계약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원인을 찾아 나섰다.

의학 전문직업성 위협하는 원인

의학 전문직업성을 위협하는 원인들을 분석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 중에 외부적으로는 불합리한 의료정책과 보험제도, 관리의료 등의 문제를 진단했다. 아울러 내부적으로 의사 개개인이 추구하는 ‘상업적 이익 추구’가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업주의의 파고에 밀려 전문직답지 않은 행위가 만연하면서, ‘시장에서 벌어지는 상충된 윤리’로 인하여 전문직업성이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고, 의사를 소명의식을 가진 전문직이 아닌 ‘단순히 하나의 사업이나 직업’으로 변질되고 있다. 의사들은 녹녹치 않은 의료환경에 점점 환멸을 느끼고 좌절하고 있으며, 사회는 의사들의 행위에 대해 냉소적이 되어가고 있다. 의료 상업주의가 의사의 윤리적 민감도를 떨어뜨리고,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가장 큰 위협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전 세계적으로 의학 전문직업성을 통한 신뢰의 회복이 가장 큰 아젠다로 떠올랐다. 의료계는 신뢰 회복을 위한 ‘의학 전문직업성’ 회복작업을 시작했다. 의학 전문직업성을 학문의 한 영역으로 도입하여 교육을 시작했고, 필요한 역량과 기준을 마련하고 평가 도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의학 전문직업성 특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구체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의료와 의사 정체성에 필수적인 핵심 내용을 담아낼 용어를 만들었다. 고전적 의학 전문직업성 특성들을 강조한 ‘노스탈직 전문직업성(Nostalgic Professionalism)’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용어를 통해 의사의 이익보다는 환자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대중의 신뢰를 유지하는 핵심임을 강조했다. 특히 고전적인 특성인 이타심, 존중 및 정직과 같은 ‘핵심 특성’을 강조했다. 구체적 방법으로 의학 전문직업성의 핵심가치를 담은 의사윤리 강령과 윤리지침을 만들고, 공식적인 진료 표준을 만들기 시작했다. 상업주의가 전문직업성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윤리강령과 지침에 이러한 면을 강조하고, 이론적으로 어떻게 전문직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상업주의의 불합리한 소굴 속에서 전문직이 될 것인지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만들어갔다.

이와 함께 의학교육을 담당하는 기구들이 함께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미국의 졸업 후 의학교육인증위원회(ACGME)에서는 전문직업성을 여섯 가지 ‘핵심 역량’으로 구분하고 전공의 인증에 이러한 역량을 관련지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정식으로 전문직업성 교육과정이 미국과 캐나다, 영국의 학부 교육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당연한 과정으로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경우도 많은 진통 끝에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평원)’이 발족되어 의과대학 인증평가 작업을 통해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의사협회에서 면허 신고에 전문직업성 평생교육(CPD)과 같은 연수교육을 연계하여 교육 참여를 높이려고 하고 있으며, 전공의 교육과정(PGME) 평가에 대해서도 의학 전문직업성 함양을 위한 시도들이 제공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헌신적으로 의학 전문직업성을 강조하더라도,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일부 의과대학 교수진은 ‘전문직업성과 같은 것’이 의대생이나 전공의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 반면 학생들은 느닷없이 전문직업성이 정규 교육과정에 투입되는 것에 대하여 ‘불필요하다’거나 ‘너무 규칙만을 강요한다’든지, 혹은 ‘우리로 하여금 규칙을 지키도록 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며 불평한다. 산업혁명 이후 의료의 상업화를 막기 위해 1803년 영국 토마스 Percival이 ‘의료윤리’를 발간했을 때 왕실 의사들은 ‘신사는 명문화된 윤리기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냉대하고, 평민의사들은 '자신들을 통제하려는 불순한 의도'라며 외면했다는 장면이 연상된다.

기성·젊은 세대 의사가 명심해야 할 것

더욱이 우리나라의 경우 40대 이후 개원의나 의과대학 교수들은 의료윤리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고, 의학 전문직업성에 대한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여서 반발이 더욱 심하다. 또한 세대적으로 ‘더 이상 힘들게 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 젊은 세대 의사들에게 전문직업성을 가치 있게 다루면서 조직적인 의학교육을 시행하는 것이 큰 숙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기성의사나 젊은 세대 의사나 반드시 명심해야하는 것이 있다. 지금 상태에서 전문직의 생명인 전문직 자율(Professional Autonomy)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하지 않는다면, 의사직종이 더 이상 전문직이 아닌 일반직종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고, 법과 타율에 의한 간섭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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