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R, 효율적 환자 진료에 초점 맞춰야

정부 진료정보 교류-환자 편리성 증대에 치중
의사엔 큰 메리트 없어…환자치료 악영향 우려

장성인
전 대한의사협회 정보통신이사

[의학신문·일간보사] 4차 산업혁명, 빅데이터,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같은 단어가 익숙해져 있다.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고 건강을 향상시키려는 인류 지식의 총아인 의학 분야에서는 더욱이 낮 설기 어려운 용어들이다.

장마철 강물처럼 흘러가는 무수한 기록 속에서 의미 있는 정보를 만들어 내고, 스스로 학습하고 확장해서 사람이 생각할 수 없던 새로운 것을 생산해낸다는 것이 마치 상상하는 대로 존재하게 하는 어린왕자의 양이 들어있는 상자와 같이 신비하다. ‘사람은 꿈꾸고 기술이 이룬다’는 광고 카피가 실감이 난다.

대한민국의 의료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질과 양과 비용에 있어서 그렇다. 그동안 의료가 국민의 복지적인 측면에서 강조되고 발전했다면, 최근에는 수준 높은 의료를 이용해서 발전적이고 생산적인 무엇인가를 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때마침 불어온 신비한 바람을 타고 더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목되고 있다.

전 국민이 가입한 단일 보험, 모든 의료공급자가 제공하는 대부분의 의료서비스가 단 한곳에 모일 수 있는 제도를 갖고 있고, 거기에다 세계 수위권의 전자의무기록(EMR) 보급률,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PACS) 보급률을 자랑 할 정도로 이미 전산화도 상당히 이루어져 있다. 이보다 좋은 판은 없어 보인다.

막상 높은 수준의 정보를 이용한 가치창출을 하려다 보니 자꾸 부딪히는 게 있다. 바로 그 높은 수준의 정보가 서로 교환이 안 되고 흐르고 합쳐지질 않는다. 특히 전자의무기록이 그렇다. 교류 목적이 아닌 효율적 관리 목적으로 개별 병원 중심의 EMR 개발이 그 발목을 잡고 있다.

이에 정부는 EMR 표준화를 위해 전자의무기록시스템 인증제의 칼을 빼 들었다. 의료법 제23조에 기반해서 전자의무기록시스템 인증제를 통한 적합하고 현실적인 전자의무기록의 표준화를 위해 정부와 학회 그리고 개발업체와 유관기관까지 중지를 모아 진지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고, 기능성·상호운용성·보안성의 측면에서 구체적인 인증 기준들이 논의되고 있다. 곧 얼마 안 있어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

이런 발전적이고 협력적인 상황에서 굳이 다시 돌아볼 만 한 잔사설을 늘어놓아 보고자 한다. 잔소리라는 것이 늘 당연하고 다 아는 이야기지만, 만에 하나 놓쳤다면 금언이 될 만한 이야기이니, 이정도 지면이야 할애할 수 있다고 보자.

의무기록의 본질은 환자의 더 나은 치료를 위한 의사의 기록이다. 의사가 환자를 진료함에 있어서 기억해 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적어두고, 필요한 때에 꺼내어 보며 더 나은 판단과 진행을 돕기 위한 도구라 할 수 있다.

지난 3월 보건산업진흥원 등이 주최한 전자의무기록시스템 인증제 기반 마련 공청회 전경.

아파서 찾아온 환자의 증상과 과거력을 기술하고 시·청·타·촉진 진찰과 각종 검사 수치, 영상기기의 결과와 소견 등을 끼워 넣고, 의심되는 질환을 적어 두고 앞으로 어떤 검사를 하면 확진할 수 있을지, 혹은 앞으로 어떻게 치료를 이어나가면 좋을지를 고민하여 그 흔적을 남기던 것이다.

당연히 손으로 이루어지던 것들이다. 짧은 시간에 의학용어들을 휘갈겨 쓰고 특수한 약자와 형태로 적다 보니 의료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알아보기 어려운 암호 같은 기록이었다. 기술이 발전하고 컴퓨터의 사용이 익숙해지면서 이러한 기록의 관리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시절이 왔고, 의사나 기관의 입장에서 전자의무기록의 사용이 익숙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점 말고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게 되었다.

차트와 영상기록을 찾기 위해 헤매는 시간과 인력이 절약되고 거기다 더 해 보관 장소와 기록의 정리 문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전자의무기록을 확산시키기 위한 재정적 지원과 노력이 있었지만, 이는 변화의 속도를 빠르게 했을 뿐이다.

다시 시간이 지나 지금에서는 더욱 고도의 기술 혜택을 이야기 한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몇 가지 촉매작용을 해줄 환경을 갖추어 주면 역시 시대의 흐름에 빠르게 적응해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 변화가 지난 과거의 그것과 과연 같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과거의 변화는 의사나 기관이 그들의 환자진료에 있어서 시간과 노력을 줄이고 효율적인 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환자 진료 현장에서 적용되는 변화가 아닌 진료정보의 교류와 이를 이용한 정보의 활용, 환자입장에서의 편리성 증대와 같은 변화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은 그것을 활용한 굉장한 무언가를 가져다 줄 수 있을지 모르기만, 그 기록을 만드는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당장 눈앞의 환자 (기록되는 환자)의 진료에 있어서 그다지 매력적인 결과를 갖다 주는 것들이 아니다.

진료정보의 표준화로 인해 정보가 교류하여 검사를 다시 하거나 하는 자원의 낭비를 줄이고, 의학이 발전하여 더 나은 치료법이 개발되는 등의 순작용은 분명 나타날 것 같은데, 그것이 당장 이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기록하는 의사에게는 메리트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표준화 화제에서“손쉬운 타인에 의한 리뷰, 관리와 의무기록의 수정과 관련한 법적 분쟁의 소지, 특정한 용어나 형태로의 기록 등”무언가 마음 불편한 이야기들이 들린다.

의무기록은 자신의 환자를 좀 더 잘 치료하기 위한 기록이고 도구였을 뿐인데, 그것이 여러 대승적이고 대의적인 목적을 갖더니 마음 편히 전문적인 생각을 적거나 계획을 적기에 불편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 본래의 기능을 잃는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분명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행태로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자의무기록의 표준화는 기술적인 것과 법률적인 것, 활용을 위한 것 등에 대한 고민에 앞서, 그 의무기록 자체가 갖는 기능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이것은 수가를 주고 시스템과 인프라를 만들어 준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자유로운 의무기록에 역으로 영향을 주는 표준화는 환자 치료 자체에 악영향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자료의 신빙성도 처음에 기대하던 그것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대의적인 목적’ 마저도 이루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전자의무기록의 표준화와 그것을 이용한 의료정보의 이용에 너무 들떠있다. 얼마나 대단한 정보를 만들 수 있고,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얼마나 부유하게 해 줄 수 있는지, 얼마를 아끼고 외국보다 어떤 경쟁력을 갖출 수 있고,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은 모두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정말 그 의무기록이 만들어지는 이유 그것 자체에 있다.

과학기술자, 경제 경영학자, 학문적 연구에 관심이 높은 학자 그리고 정치인들 모두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지만 가장 먼저 듣고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진료실에서 진료하는 의료진과 그들에게 진료를 받고 있는 그 환자의 치료다.

너무 기본적인 것이라 차마 이런 것을 간과하고 무언가를 그렇게 거창하고 열심히 진행증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면 그간의 시간과 노력이 아깝더라도 맨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만큼 중요한 문제다. 훌륭한 보건의료 자원과 인프라를 이용한 4차 산업 혁명의 결과를 어서 체험하게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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