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minal' 임종기-말기 구분 한국 유일…연명의료 ‘유보 결정’ 절차 복잡
허대석 교수, 연명의료 절차 복잡 실효성 떨어져 시행령·시규 등 보완 필요

[의학신문·일간보사=정윤식 기자]

#1. 뇌혈관 기형으로 출생한 한 아이는 장애아가 된 후 입양 시설에 맡겨졌다. 어머니는 아이가 시설에 입소한 이후 연락을 끊었고 아버지도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잠적했다. 아이를 정기적으로 찾아갔던 보호자는 고모가 유일했는데 아이가 20살이 된 후 급격히 상태가 나빠져 연명의료 유보결정을 해야 했지만 고모는 친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결정을 할 수 없었다.

#2. 만성폐질환으로 입원한 50대 환자 A씨는 회생 가능성이 없어 연명의료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10년 만에 찾아와 현재 가족과 반대되는 의견으로 충돌했고 이에 A씨는 불필요한 고통을 받다가 사망했다.

#3. 폐암 환자 60대 B씨는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했으나 야간에 급격히 상태가 악화됐고 전문의가 환자판단서를 작성하기 위해 병원으로 이동하기도 전에 사망했다.

#4. 췌장암 환자 C씨는 연명의료계획서에 동의했으나 기력이 없어 서명을 할 수 없었다. 녹취를 시도하였으나 어떤 방식으로 녹취하고 기록을 남길지 명확한 기준이 없어 시행하지 못했고 차선책으로 2인 이상의 가족 진술과 가족관계증명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하 연명의료결정법)'의 본격 시행이 일주일 앞(2월 4일)으로 다가왔다.

환자 스스로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결정을 존중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입법 취지에 반대하는 여론은 크게 없지만 의료계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의료기관 사망자 대부분이 이 법의 적용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행령과 시행규칙 제정 과정에서 여러 쟁점들이 생겨났고 결국 현실과 동떨어진 법이 됐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당장 시행을 앞둔 연명의료결정법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개정해야 할 부분은 무엇이며 의료기관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등을 서울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허대석 교수와 함께 짚어봤다.


■ 말기와 임종기 진단의 어려움 그리고 ‘유보’ 보다 ‘중단’에 집중한 법

우선 허대석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법 집행 과정에서 흔히 말하는 ‘terminal’을 또다시 ‘임종기’와 ‘말기’로 나눠 혼선을 주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연명의료 판단은 임종기에서만 하고 호스피스 보험급여 신청은 말기부터 하자는 취지에서 나뉜 것인데 이 과정에서 기술적인 오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실제 해외 어느 나라에서도 terminal을 임종기와 말기로 나눈 곳은 없으며 보수적인 접근에서도 가장 제한적인 입법이 대한민국의 ‘연명의료결정법’이라는게 허대석 교수의 지적이다.

허대석 교수는 “암환자들의 경과는 상대적으로 예측하기 쉬우나 암 이외의 질환은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면서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어느 시점이 말기 또는 임종기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며 “미국, 유럽, 일본, 타이완 등에서는 말기와 임종기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terminal로 통일해 적용하는데 우리나라는 법의 남용을 우려해 굉장히 제한적으로 용어를 만들어 혼선이 왔다”고 말했다.

법이 ‘연명의료 중단 등의 결정’이라고 주로 표현하고 유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도 문제점이라는 지적을 이어간 허대석 교수다.

허 교수는 “1년 동안 의료기관에서 사망하는 환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가장 흔한 상황은 ‘환자의 의사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연명의료 유보 결정’으로 약 15~17만 명이 해당되는 반면 연명의료 중단은 3~5만 명”이라고 설명했다.

즉, ‘중단’보다 ‘유보’가 훨씬 큰 문제인데 ‘유보’에 ‘중단’과 동일한 수준의 복잡한 서식 절차를 요구하고 있다는 의미다.

허대석 교수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중단’을 하는 데는 엄격한 법 적용을 하지만 ‘유보’는 DNR과 같은 간단한 서식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국내 법안은 ‘유보’도 ‘중단’만큼 지나치게 복잡한 절차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실제 국제적으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Advance directives; AD), 연명의료계획서(POLST), 심폐소생술금지동의서(DNR) 등 세 가지 표준 서식 중 하나만 작성하면 되나 우리나라는 AD, POLST 외에도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 판단서,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에 대한 환자 의사 확인서 및 이행서를 추가로 작성하게끔 요구하고 있다.

특히 이런 문서는 의사 2인 이상의 확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의료기관(요양병원 등)에서는 수행하기 어려운 요구 사항이라는 것.

또한 허대석 교수는 환자 가족이 의사결정에 조금이라도 관여하게 되면 ‘가족관계증명서’를 통해 가족 여부를 의사가 확인하도록 하는 책임도 부과해 연명의료 결정 자체를 복잡하게 만들어 실효성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점으로 삼았다.

아울러 국내 연명의료계획서는 본인뿐만 아니라 보호자(가족, 대리인 등)가 연명의료결정을 대신 할 수 있게 인정한 POLST의 기본 정신을 도입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허대석 교수는 “해외에서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만들었지만 POLST로 전환한 주된 이유는 본인 작성률이 30%를 넘지 못해 보호자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며 “우리나라는 POLST를 번역하면서 외국과 달리 대리결정을 허용하지 않고 본인이 작성한 양식만 법적으로 인정하는데 이로 인한 많은 문제점이 예상된다”고 언급했다.

■ 시범사업은 사실상 실패, 현실 고려치 않고 법으로 모든 상황을 규정하려 한 법

정부는 앞서 연명의료계획서 참여기관 10곳(상급종합병원 7곳, 국공립종합병원 3곳)을 통해 약 3개월간 시범사업을 실시했고 그 결과 총 107건의 연명의료계획서(POLST)가 작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허대석 교수

서울대병원의 연명의료 상담 결과를 살펴보면 △병원에 입원한 전체 말기 및 임종기 환자는 300명 △연명의료 상담 48명 △연명의료 계획서 작성 18명 △계획서를 썼지만 연명의료를 받다가 사망한 환자 2명 △계획서에 따라 연명의료를 중단한 환자 1명으로 확인됐다.

허대석 교수는 일반인의 90% 이상이 고통스러운 임종과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연명의료계획서가 107건 밖에 작성되지 않은 것은 사실상 시범사업이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견을 건넸다.

허대석 교수는 “한해 의료기관 사망자 20만 명, 3개월이라는 시범사업 기간, 상급종합병원 42곳 중 참여기관 7곳. 이들을 단순 계산해 보면 시범사업 동안 약 83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8300명의 1.3% 밖에 되지 않는 단 107명만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즉, 존엄사를 찬성하는 사람은 90% 이상인데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은 10% 이하인 것은 계획서 작성과정이 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지 ‘서류 작성을 못했다=본인이 원했다’로 해석하면 안된다는 허 교수의 설명.

허 교수는 “동의를 받기 위해 환자에게 접근하는 의사를 가족들이 거부하는 경우도 있고, 의사 2명이 상시 근무가 불가능해 때를 놓친 경우도 있으며, 복잡한 서식 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법정 서식 작성이 무척 어렵게 돼있어 결국 방어진료에 의한 연명의료 조장 위험성이 내포돼 있다”고 비판했다.

제도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항목을 열거하고 이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제도여야 하는데 법에 명시되지 않은 것은 모두 불법으로 규제하려 한 부분도 비판한 허대석 교수다.

허 교수는 “의료진과 환자 가족이 공모해 환자에게 불리한 결정을 할 수 없게 우리나라는 규제 중심으로 법과 시행령, 시행규칙이 만들어졌다”며 “연명의료결정은 복잡한 의료 기술적인 문제와 환자, 가족의 가치관을 반영해 판단하는 과정인데 모든 문제를 법으로 규제하겠다는 잘못된 발상”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이어 “미국은 2페이지 분량 밖에 되지 않는 선언적 법률인 대신에 미국의사회의 윤리 지침에서 45 페이지에 달하는 자세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며 “반면 대한민국은 법률이 43페이지이고 대한의사협회 윤리 지침은 단 1쪽인데 진료 현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법을 만들고 집행하겠다며 탁상공론을 반복해온 결과”라고 말했다.


■ ‘중단’은 까다롭게 하는 것이 맞으나 ‘유보’는 시행령과 시행규칙 손봐야

허대석 교수는 연명의료를 결정하는 방식 중 가장 이상적인 안은 환자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나 현실에서는 본인이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했다.

우리나라는 입법 과정에서 과도한 걱정을 해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데 미국과 일본은 환자 입장에서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의료진과 가족이 상의하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어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허대석 교수는 “연명의료결정법은 식물인간 상태를 눈높이로 잡고 법이 만들어져 상당히 까다롭다”며 “중단은 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복잡하게 구성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유보는 복잡하면 시행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강조했다.

즉, DNR을 국제표준양식에 맞춰 국내 실정에 맞게끔 수용해 유보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의료현장에서 수용이 가능하다는 것.

서울대학교병원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마련한 연명의료 결정(중단, 유보) 방안.

아울러 허대석 교수는 법의 본격적인 시행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에 개정 전까지 시뮬레이션을 많이 실시해 경우의 수를 다양하게 경험한 의료기관을 최대한 참고해 법을 따라야 한다는 제언을 건넸다.

허대석 교수는 “제일 좋은 것은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므로 본인 작성을 최우선으로 하되 불가능할 경우에는 모법 17조에서 명시하고 있는 서식 11번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 교수가 설명한 모법 17조란 ‘환자가 의사결정 능력이 없을 때는 가족 2명 이상의 일관된 진술을 본인의 의사로 본다’는 부분으로 미국의 경우 기본 서식에 포함시켰으나 국내는 서식 11번으로 따로 떼어놨다.

허 교수는 “이것도 저것도 안된다면 의료법 등 다른 법률이 적용되는데 외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DNR 서식을 만들어 작성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는 환자 가족들에게 미리 공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서식에 대해서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환자 입장에서 무엇이 최선인가 논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서울대병원 의료기관윤리위원회는 2016년 1월부터 많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연명의료결정 방안을 마련했는데 이 규정과 서식을 분당서울대병원, 보라매병원과 함께 적용한 후 보편화되면 외부 중지를 모아 표준화시켜 보급할 계획도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연명의료 문제는 법을 시행하고 단속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며 “어떤 모습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생각해 새로운 규범을 마련해야 진료 과정에 적용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