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자연경관 외에도 200여개의 문화재가 잘 보존된 남한산성은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걷기 여행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산성의 4개 문 전부 돌아보는 7.7㎞코스도 있고, 성곽따라 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종주코스도 부담스럽지 않다.

이정균
이정균내과의원장 ·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해발 500m에 달하는 청량산 정상을 향해 버스가 달린다. 남한산성 종점에 도착하면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남한산성이 지금처럼 역사, 관광지 및 레저의 중심지가 된 모습을 갖춘 것은 조선시대 후금의 위협이 높아지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조선 인조 임금 때다.

인조 2년(1624년)이었다. 2년여의 축성공사 끝에 1626년에 완공되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청나라 12만 대군이 처내려온 병자호란에서 방패역할을 해낸 역사적 장소다. 그러나 고립된 성에서 식량마저 고갈되자 인조는 47일간의 항전 끝에 항복하기로 한다. 이러한 인조의 치욕을 잊었는지 지금의 남한산성은 아름답기만 하다.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걷기 여행 명소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남한산성의 길이는 11.7㎞(본성 9㎞, 외성 2.7㎞)이다. 높고 낮은 봉우리가 계속 이어져서 계곡이 많고 청정지역에 사는 가재나 도롱뇽도 만날 수 있다. 또 흔히 보기 어려운 야생화와 나무도 자란다. 성의 지휘소, 관측소 역할을 하던 수어장대 일대에는 80~100년생 소나무 숲이 72㏊나 펼쳐져 있다. 이런 노송이 군락을 형성하는 곳은 서울·경기지역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뛰어난 자연경관 외에도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200여개의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역사문화의 발자취도 느낄 수 있다.

남한산성은 통일신라 때부터 한강유역을 방어하는 군사요충지였다.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 신라 문무왕12년(672년)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 주장성을 토대로 지금의 남한산성이 구축됐다. 2007년에는 지금의 행궁 자리에서 통일신라 군창지(군량미창고)터가 발굴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략을 두 차례나 막아냈다. 남한산성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 시기의 다양한 축성기법이 남아있다. 우리나라 성곽발달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남한산성의 길이는 본성 9㎞와 외성 2.7㎞를 합쳐 총 11.7㎞에 이른다. 눈 덮인 성곽 모습.

1000년을 훌쩍 넘긴 유적지인 남한산성 안에는 성곽·행궁을 포함해 모두 12개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행궁 앞 산성로터리는 남한산성 탐방 1코스 출발점이다. 북문~서문~수어장대~영춘정~남문을 지나 다시 산성로터리로 돌아오는 코스는 방문객이 제일 많이 모이는 곳이다. 그 길이는 3.8㎞, 돌아보는데 1시간 20분쯤 소요된다. 널찍한 포장도로를 걷기보다는 성곽 따라 걸어가면 흙길을 밟으며 산책하듯 걸을 수 있어 좋다. 북문 성곽 너머로는 하남시가 잘 보이는 코스다. 남한산성은 서울 도성의 구조와 비슷하다. 그러나 북문은 서울 4대문과 비교하면 작다. 통행엔 지장은 없었다. 서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성인 세 사람이 나란히 서면 문이 꽉 찰 정도다. 문의 높이는 2m를 넘길까 말까할 정도의 문들이다. 청태종은 인조에게 이 작은 문을 통과하여 삼전도까지 걸어 나오라 명했다. 서문밖에 있는 전망대에서 옛 삼전도가 있던 곳을 상정하며 현재 석촌호수가 있는 쪽을 내려다보며 그 옛날 인조가 걸었던 길을 눈으로 따라가 보면 그 거리는 꽤나 먼 거리였다.

서문을 지나면 수어장대에 이른다. 수어장대는 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대는 장수가 군대를 지휘하던 건물장소로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두었다. 현재 남아있는 장대는 수어장대(서장대) 뿐이고 다른 장대는 터만 남아있다. 수어장대를 지나 남문에 도달하게 되는데 남문은 주출입문이며 출입구가 되고 있다. 남문을 지나면 산책로로 이어진다.

남한산성 걷기 정수코스는 남한산성 성곽 따라 한 바퀴 도는 코스 벌봉과 벌봉을 싸는 봉암성이다. 벌봉은 해발 512m이며, 남한산성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는 벌봉에 올라 성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화포공격을 해왔다. 병자호란을 치르면서 벌봉 일대가 남한산성의 약점인 것을 확인한 조선 숙종은 1686년 봉암성과 한봉성을 쌓아 본성과 이으라고 지시했다. 봉암성은 남한산성 북동쪽 능선의 꼭짓점이라 할 수 있는 동장대터 부근에서 시작되었다. 봉암성은 병자호란 뒤 증축한 뒤 더 이상의 손상을 막기 위한 기본조치 이외엔 증축은 없다.

남한산성의 4개의 문을 전부 돌아보는 7.7㎞코스도 있고, 성곽 따라 탐방로가 잘 조성돼 있어 종주코스도 부담이 가지 않는다. 마천동 입구를 들머리로 삼으면 남한산성 4개의 문중 서문(우익문)을 먼저 만난다. 서울 지하철 5호선 마천역을 맞아 1번 출구를 나서면 마천동에서 서문까지는 약 1시간, 마천동 만남의 장소 앞에 등산안내판이 있다.

이곳에서 상가 골목길을 가로지르면 등산로 입구로 직행한다. 약 10분정도 가면 산불 감시초소 옆에 산길이 열려있다. 등산로 입구에서 성불사 방면까지 임도를 걷고 나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여기서 이정표를 따라 연주봉 옹성 방면으로 향하면 된다. 서문까지는약 1.3㎞로 길은 쉽고, 경사도 완만하다. 간간이 나무계단, 돌계단을 오르면 어느새 서문이 있는 능선이다. 서문에서 이정표 따라 수어장대 방면으로 향한다. 성곽 안쪽길은 인공가미길, 바깥쪽 길은 자연 지형 그대로를 보존했다. 성벽외곽길 따라 600m 정도 걸어가면 성벽과 떨어져 있는 수어장대가 반갑다. 수어장대는 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현재는 서쪽 수어장대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 4개 문중 가장 규모가 큰 남문(지화문)

수어장대를 지나면 곧 남문이다. 남문은 남한산성 4개문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그 이름은 지화문이다. 남문에서부터 안쪽 성곽길을 따라야 남장대터를 볼 수 있다. 몇 차례 가파른 길을 지나면 제2남옹성이 있는 남장대터에 이른다. 동문에서 다시 경사가 가팔라지고 장경사와 만나고, 작은 암문을 넘으면 장경사신지움에 들어갈 수 있다.

1636년 음력 12월 14일 조선 인조가 청나라 군사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인조는 47일을 성안에서 버티다 이듬해 1월 30일 성을 걸어 나와 항복했다. 양력으로 따지면 380년 전 겨울 이맘 때다. 세월이 흘렀다. 굴욕의 역사는 희미해졌다. 남한산성은 이제 대표적인 서울 근교 나들이 장소가 되었다. 진입로를 따라 닭볶음탕 집이 줄지어서 있다.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는 몽촌토성부터 남한산성까지 이어지는 길을 ‘토성산성 어울길’로 이름 붙이고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했다.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남한산성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인조가 입성했던 남문부터 스스로 걸어 나왔던 서문까지 남한산성을 걸어 보았다.

조선의 왕이 항복하러 성을 나와 걸었던 380년 전 그날은 몹시 추웠다고 전한다. 그날의 짧은 산책 긴 상념을 되새겨 보면서 그 길속의 남한산성 이야기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역사에서 남한산성이 함락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난공불락의 요새 남한산성에는 병자호란의 굴욕이 씻기지 않는 오명처럼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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