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는 환상이다. 거울속의 오른손은 거울 앞에 선 사람의 왼손이다.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로잡힌다. 거울이 꾸미는 광학적 눈속임이다. 눈 속임, 아니면 착각일까. 시몬 베이유는 “아름다운 여인은 거울을 보고 자신이 바로 그 모습 자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못 생긴 여인은 그게 다가 아니란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 착각은 거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스스로가 자아내는 결과일 것이다. 거울을 보고 있는 그 순간의 마음새에 따라 예쁘게 또는 밉게, 멋지게 또는 열등하게 내가 보는 것이지 거울이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거울은 그저 비추인 것을 반사할 뿐이다.

유형준
한림의대 내과 교수
시인/수필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아침에 눈 뜨면서 제일 먼저 하는 행동 중의 하나는 거울보기다. 정확히 이르면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동작을 한다.

세상은 거울로 점점 가득 차고 있다. 작은 손거울에서 초고층 빌딩 전체를 온통 감싼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은 거울 그리고 은밀하고 세미한 행위와 말썽까지 찍고 때론 자진하여 드러내는 폐쇄회로텔레비전(CCTV)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 불리는 거울들.

그러나 크기와 기능에 상관없이 거울이 반사하는 모양은 순전한 그대로가 아니다. ‘거울의 역사’에서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반사상은 언제나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는 욕망에 가려 단 한 번도 완벽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따지고 보면 좌우를 바꿔 놓고, 안팎을 뒤집어 놓고, 주체를 객체로 만드는 광학적 결과는 낯섦뿐이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면 닮음의 왜곡이다. 보네의 책에 서문을 써준 프랑스 역사학자 장들뤼모도 거울의 양면성을 지적한다.

이처럼 광물성인 거울의 광학적 현상은 거울에 모습을 비추는 스스로의 해석과 수용에 의해 미추(美醜)로 갈린다. 해석의 지나친 양극단의 결과는 안타깝게도 똑같이 죽음에 닿아있다.

나르키소스는 숲속의 물에 나타난 아름다운 소년을 발견하고 껴안아 입맞춤을 하려한다. 그것이 반사된 자신의 모습인 것을 알아차린 그는 무감각한 잠에 빠진 듯 모든 욕망을 잃고, 결국엔 자기 가슴을 칼로 찌른다. 출생 시에 점쟁이 테이레시아스가 그의 어머니에게 던진 수수께끼 같은 예언에 답이라도 하듯이 “이 아기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천수를 누릴 것이다.” 그가 죽은 자리에서 ‘자기사랑’이란 꽃말의 수선화가 피어났다.

“거울아, 거울아 이 나라에서 누가 가장 예쁘지?”“함께 사는 백설공주가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요.”

거울이 하는 말을 듣자 왕비는 분노에 온몸을 떨며 독이 든 사과를 만들었다. 교묘하게 빨간 쪽에만 독이 몰려있게 만든 붉은 뺨의 흰 사과. 누구든 본 사람은 먹고 싶은 욕망을 누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먹음직스러웠다.

거울은 정체성 탐구의 일상용품이다. 개인의 거울은 개인을, 사회의 거울은 사회의 그 정체성을 돌아보는 생활일상용품이다. 일상생활용품의 존재 목적은 삶의 평탄과 풍요에 있다. 나를 돌아보고 사회 형편을 둘러보아 웃자란 돌출은 누그러뜨리고, 덜 자란 잔망스러움엔 무게를 보태어 주고, 턱없이 묻은 패설(悖說)은 정성껏 닦아내는 일을 보조하는게 거울의 존재이유다. 그래서 보네는 ‘거울은 꿈과 현실의 매개로 기능한다“면서 ’거울의 이타성‘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늘 지나온 과거가 마뜩치 않다고 여기던 이가 어느 홀로 독방에 들어가 ‘지나간 세월’을 통째로 거울 앞에 쌓아놓고 이리저리 비추다가 번득 떠오른 나름 기가 막힌 해법을 불쑥 내어민다. “후딱 다 치워버리자.” 그러자 버려질 ‘그 세월’ 속에 ‘혹시 쓸모 있는 부분이 섞여 있지는 않을까’, 가족과 친지들의 염려가 늘더니 급기야 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리거리로 쏟아져 나와 쌓이기 시작한다. 그는 거울 앞에 설 줄은 알지만 거울의 용법은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게 확실하다. 거울의 양면성, 거울의 환상성, 거울의 보조용 품성을 넉넉히 깨우치지 못한 어설픔이다. 거울 속의 반사상만 쳐다보고 그 모습에 빠져 거울에 비춰지지 않은 거울 밖의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헤쳐가고 있는 삶의 질서를 보지 못한 답답함이다.

파스칼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삶엔 세 가지 질서가 있다. 육체의 질서와 사람 간의 질서와 마음의 질서다. 어느 하나라도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생각, 지식과 진리, 메시지와 빅데이터, 가치관 등이 뒤죽박죽 흐트러져 탈이 나고 고장이 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모습에 지나치게 몰입된 사람은 무질서한 덫에 걸려 사과에 독을 넣고 제 가슴에 칼을 꽂을 수도 있다.

거울은 변하지 않는다. 광물로 만든 거울은 있는 그대로 형상을 반사한다. 거울은 자기 확인과 자기 표상의 무덤덤한 보조품일 뿐이다. ‘거울 앞의 나’와 ‘거울에 비친 자기’가 같을지 다를지를 가르는 일은 전적으로 거울 앞에 선 실재의 몫이다. 그 몫을 감당하는 실재의 정체성이 반듯해야 마주선 실재와 반사상이 서로 지탱하여 삶을 제대로 튼실하게 한다. ‘거울아 거울아’ 물어볼 게 아니다. 설령 묻는다 해도 거울이 답할 일은 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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