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인 노인들은 상급자이자 숙련자이다. 존경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다.
경제도 좋아 지고, 노인복지제도도 완비되어 노인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신언항
인구보건복지협회 회장

[의학신문·일간보사] 필자가 어렸을 땐 나이 먹은 게 자랑이었다. 처음 만나면 나이를 확인하고 한 살이라도 많으면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말다툼을 할 때면 “너는 위아래도 없느냐?”며 나이를 내세웠다. 그러면 상대방도 “너야말로 장유유서(長幼有序) 도 모르느냐?”고 받아쳤다. 마지막에는 “어디, 도민증(道民證) 좀 보자!”고 하여 생년(生年)을 확인하고 동년 생이면 생일(生日)을 따져 하루라도 빠르면 의기 양양해 했다.

그러던 것이 세상이 확 바뀌었다. 젊고 어려 보이는 것이 경쟁력인 시대가 되었다. 한 살이라도 젊게 보이려고 옷과 헤어스타일에 신경을 쓰고, 남자들도 성형(成形)을 한다. 나이 들어 보이면 차별과 무시를 받게 되고, 취업, 승진 등에서 불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식당에선 “여긴 젊은이만 오는 곳 이예 요”라고 노골적으로 냉대하며, 노인들은 가까운 곳만 다닌다고 택시도 태워주지 않으며, 노임도 적게 주는 등 노인들을 서럽게 한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나이 먹는 것이 오히려 자랑 아닌가! 우리는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에 이른 사람을 존경하고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어 한다. 세계에서 제일 높고 험난하다는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사람을 누구나 존경한 다.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 죽을 고비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삶은 그 이상 위험하고, 어렵고, 고단한 여정이다. 이런 삶을 65년 이상 살아 생존했으니 자랑할 만하지 않을까?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허무(虛 無)’라고 하고, 성경은 ‘헛되고 헛되며, 아침 이슬처럼 스러지는 것’이 인생이라 고 한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남녀, 지위의 고하,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누구 나 삶은 고달프고 힘들다는 것에 이견이 없다. 그러니 70세쯤 되는 지긋한 나이 가 되면 젊은이들에게 “당신들도 거친 세상 한 번 살아 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산을 내려오면서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얼마 안 남았어요. 힘 내세요” 와 같이 말이다.

‘헬조선’ ‘N포 시대’라고 자조(自嘲)하면 서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만이 유일하게 정치‧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만일 광복 후 각계의 지도자들이 부 패했거나 오직 자기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했 다면 이렇게 성공한 나라가 되었을까? 국민 들은 오로지 “잘 살아 보세”라는 일념으로 밤낮없이 뛰고, 없는 살림에도 자식을 교육 시켜 이만한 나라가 된 것이다. 피 흘려 쟁취 한 자유민주주의 아닌가?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 때의 주역들이 지금의 노인들이다. 노인을 시니어(senior)라고 한다. 로마 군단에서 ‘가장 숙련된 용사’를 시니오레스(seniores)라고 부르던 것이 시니어 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노인은 상급자이자 숙련자이다.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 들이다.

나이 많은 노인들은 요즘 세대가 겪지 못한 일을 겪었다. 이 또한 자랑할 만한 일이다. 필자는 광복(光復) 이듬해에 이북(以北)에서 출생했다. 네 살 때, 6·25동란시의 피난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햇볕이 뜨겁게 달구는 신작로(新作路, 당시엔 큰 길을 그렇게 불렀다)를 어머니와 걷던 악몽이다.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머리엔 이불보따리를 이고 앞서 간다. 군인을 가득 실은 트럭이 먼지를 자욱하게 흘리며 줄줄이 지나간다. 태워 달라고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어머니한테 업어 달라고 떼를 썼지만, 어머니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주저앉아 “안 간다”고 떼를 쓰니, “그래! 오지마!”하고 그냥 앞서가시는데, 오른쪽 커브길로 도는 어머니가 보이 지 않자, 허겁지겁 쫒아 갔던 기억이 난다. 하마터면 고아가 될 뻔 했다.

요즘 이런 경험을 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4‧19, 5‧16, 월남파병, 10월유신, 6‧29민주화선언, 촛불혁명 등 헤일 수 없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살았다. 과거를 회상하면 그저 파란만장(波瀾萬丈)하다. 이 모든 것이 오래 살았기 때문인 것이 다.

그런데 지금 노인들의 삶은 참으로 고달프다. 나라발전, 자식걱정만 했지 정 작 노령화에 걸 맞는 사회보장제도가 완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폐지를 수집하 거나, 택배를 하시는 노인, 허리가 꼬부라지신 분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저분들은 앞만 보고 달렸을 터인데…. 한편으론 ‘저분들 덕분에 이만큼 잘 살게 되었지’라는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김밥 한 줄과 500원을 받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교회 앞에서 줄을 서는 노년의 삶이지만 치열하게 사시는 이들에게 위로와 함께 찬사를 보내고 싶다. 경제도 좋아 지고, 노인복지제도도 완비되어 노인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주민등록증 까 봅시다. 누가 더 나이가 많은지”라고 다투는 세상이 다시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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