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욱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제약바이오산업 단장

[의학신문·일간보사] 작년 미국에서 크게 흥행한 ‘히든피겨스’라는 영화는 1960년대 NASA에서 일하던 여성 계산원들이 차별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꿈을 쟁취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세 명의 주인공 모두 열정이 대단하지만 필자는 그 중에서도 푸근한 이미지의 도로시 본을 눈여겨봤다. 수기 계산원을 대체할 슈퍼컴퓨터가 도입된다는 소식을 듣고 컴퓨터를 다루는 언어(포트란)를 공부했던 당찬 그녀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기술의 흐름 앞에서 손 놓고 일자리 걱정부터 하지 않았을까. 익숙하게 해 오던 것을 버리고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제약·바이오산업도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 앞에 그동안의 익숙함을 버리고 한 발 더 나아가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바로 빅데이터의 활용이다. 인공지능, IoT, 로봇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의 재료인 빅데이터는 모두에게 익숙한 개념이 되었지만, 이를 활용하여 산업 현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오는 2025년 유전자 정보의 양이 YouTube 데이터를 넘어설 것이라는 분석도 있을 만큼 데이터는 풍부한 반면, 활용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데이터 과학자(Data Scientist)를 21세기 가장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말하는 이면에는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이 있다. 미국은 2018년까지 14만~19만 명의 데이터 전문가가 부족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공급자 중심의 기관별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 어렵다는 국내 제약사들의 답답함 역시 ‘Data Silos(데이터 사일로; 데이터가 고립적으로 활용되는 현상)’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으며, 데이터를 활용하려면 누구나 풀어야 할 숙제다. 결국 현 상황의 어려움은 우리 제약·바이오산업의 역량이나 투자 부족 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데이터라는 도구 자체의 특성 때문이다.

이처럼 빅데이터 활용의 어려움이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이제는 소극적인 태도보다는 과감한 도전을 시도해 볼 때가 아닐까. 제약·바이오산업은 신약개발, 임상시험, 제조·유통 등 산업의 전 가치사슬이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과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산업이기에 그 파급효과는 더 크다고 생각한다.

미국, 유럽, 아시아 등 헬스케어 전문가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GBI Research, 2016)에서 향후 5년 이내 빅데이터에 투자할 가치가 없다고 응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지역과 분야를 막론하고 모두 제약·바이오 데이터의 잠재력에 대해 입을 모은다.

지난 9월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제약·바이오산업 분야의 4차 산업혁명(Pharma 4.0)에 대한 포럼을 개최했다.

탐색부터 임상, 생산, 영업까지 실제 현장에서 데이터를 활용하고 있는 전문가들과 함께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와 가능성에 대해 공유하는 소중한 자리였다. 물론 아직까지 포지티브 규제의 문제점,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 등 풀어야 할 숙제는 많지만 이와 관련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앞으로도 진흥원은 제약산업 종합계획 수립, 보건의료 빅데이터 추진단 등을 통해 업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필요한 지원을 마련할 계획이다.

역사적으로 제약·바이오산업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산업이 한 걸음 진보하는 양상을 보였다. 분자구조를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연한 발견에 의존하던 신약개발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유전공학의 발전은 바이오의약품 탄생으로 이어졌다(제약마케팅, 2015). 태생 자체가 혁신인 제약·바이오산업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큰 흐름 앞에 더욱 주목 받는 이유다. 변화에 대한 업계의 긍정적인 인식과 도전 그리고 이를 지지할 수 있는 정부의 지원을 통해 우리 제약·바이오산업이 한 걸음 앞서갈 미래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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