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법제이사

[의학신문·일간보사] 최근 다시 낙태 합법화 관련 논쟁이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태아의 생명권 존중이라는 가치가 여성의 임신·출산의 자기결정권보다 강조되는 것을 이용하여 국가의 사회경제적 필요에 따라 다르게 시대에 따라 강요해 왔다는 점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더 이상 ‘낙태 찬성이냐 반대냐’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논쟁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낙태를 할 경우 임신부와 의사를 모두 처벌하는 쌍벌주의를 채택하는 나라는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나라는 쌍벌주의까지 채택하며 강력히 낙태를 처벌하는 법률을 유지해 온 것이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우선 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수 십 년간 태아의 생명권을 강조한 결과는 법을 지키지 못할 불법행위로 인하여 부작용만 양산시키고, 인공임신중절수술을 줄이는데 실패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는 인공임신중절과 관련해 현실적으로 수용 가능한 법, 제도, 문화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이에 외국의 사례를 보면서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현재 임신부의 요청에 따른 낙태를 허용하거나 처벌하지 않는 나라는 60여 개 국이며,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을 때에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는 10여 개국이다. 반면 바티칸 시국, 몰타, 도미니카공화국,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 5개국은 낙태를 예외 없이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독일은 1990년 통일 전까지 동독에서 임신 12주 이내 낙태는 허용되었고, 서독에서 낙태는 강간 등 범죄피해, 근친상간, 유전적 이유 등 특정 조항에 해당하지 않으면 형법상 처벌 대상이었다가, 통일 후 형법 218조와 219조를 개정해 낙태 처벌 예외 조항을 만들었다. 여성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임신 12주 이내에는 낙태를 할 수 있다. 다만, 낙태 시술을 위해서는 전문가의 상담을 반드시 받고 그 증명서를 의사에게 제출해야 한다.

임신을 유지할 수 없는 다양한 임신 갈등에서 오는 상황을 지원할 수 있는 법률 제정도 동시에 이뤄졌다. 태아 보호, 아동친화사회 촉진, 임신으로 인한 갈등 상황의 해결을 위해 다양한 사회적 지원을 위한 제도 마련 및 낙태 관리를 위한 법률(일명 ‘임산부·가족지원법’)을 1992년 제정하였다. 이 법률에 따라 여성과 남성은 성·가족·피임·임신·출산 등 생명 탄생과 관련한 모든 주제를 갖고 상담 전문가나 의사로부터 상담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게 됐다.

결과적으로 가임기 여성 1000명당 낙태아 수를 나타내는 낙태율도 2007년 6명에서 2014년 5.5명으로 감소했는데, 같은 기간 가임기 여성 1000명 당 출산율은 39.1명에서 42.1명으로 상승했다. 결국 독일 사례에서 볼 때 낙태 합법화는 생명 경시의 시작이 아니라, 생명 존중의 출발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미국은 인공임신중절의 기간제 허용사유를 택한 나라로, 헌법상 기본권인 프라이버시권(Right of Privacy) 속에는 여성의 낙태권도 포함되어 있고, 태아의 생명권도 보호해야 하므로 두 권리를 조화롭게 적용하고 있다. 임신 첫 3개월간은 태아의 독자적 생존가능성이 적어 여성의 낙태권을 우선하고, 그 후 4개월~6개월의 3개월간은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을 해치는 경우 등 일정한 경우에 낙태를 허용할 수 있다. 그 후 임신 7~9개월의 3개월간은 태아의 독자생존 가능성이 커지므로 여성의 낙태권보다는 태아보호의 이익을 우선하고 있다. 그밖에도 네덜란드와 스웨덴의 경우에도 각각 임신 초기에는 본인이 요청한 경우에는 임신중절이 가능하다.

이에 임신 주수별로 위법 적용 여부를 달리하거나, 인공임신중절 인정 범위에 사회경제적 사유와 태아 사유를 확대하는 방안과 임신부와 의사를 모두 처벌하는 쌍벌주의 또한 폐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임신초기의 3개월 이내에서는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가치에 대하여서는 사회적 합의가 의학적인 시각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미혼의 경우라도 출산과 양육 지원을 가임 여성의 지원과 동등한 혜택을 통해 여성이 사회경제적 사유로 출산을 포기하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 또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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