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균
서울 성북-이정균내과의원장
의사평론가

행주산성에 올라가 보면 시원스레 탁 트인 사방의 시야에 깜짝 놀란다. 서울근교에도 이런 곳이 숨어있었다며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덕양산 정상 행주대첩비가 있는 곳, 정상 밑 덕양정 정자에 서서 한강을 바라다본 주변 풍경은 자유로워 한강을 가로지르는 방화대교, 가양대교, 성산대교, 여의도 63빌딩과 쌍둥이 빌딩 그리고 국제금융센터와 오른편으로는 관악산 정상이 얼굴을 내밀었다.

덕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한산과 그 주변 풍경은 압권이다. 강매동 들판 뒤로 펼쳐진 암봉산악은 왼쪽부터 백운대, 노적봉, 나한봉, 문수봉 그리고 보현봉이 모두 조망권이다. 서울을 둘러싼 산들이 병풍처럼 굽이굽이 한강이 산수화처럼 눈을 휘둥글게 만든다.

그 옛날 개성 보부상들이 한양 땅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삼각산의 세 봉우리에 압도당하여 큰 절을 했다는 옛 이야기가 뇌리를 스친다.

황홀한 경치에 놀라서가 아닐게다. 가까운 강 건너 김포와 발아래 한강, 고양시 주변 일대 평야는 산 정상에서 사면팔방으로 둘러볼 수 있었고, 도도히 흐르는 한강의 모습은 더더욱 멋지다. 동쪽의 여의도 63빌딩부터 서쪽의 일산대교까지 다리 하나하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보인다.

북한산, 남산, 관악산, 개화산(서울 강서), 심학산, 계양산(인천 계양), 고봉산(경기 고양) 등 뭇산들이 서울을 성벽처럼 감싼 모습은 눈앞에 펼쳐지는데, 이렇게 산에 둘러싸인 서울 모습을 온전히 확인하기 위해서는 덕양산 정상에서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

북한산을 오른 사람들은 많지만 북한산의 온전한 모습을 한눈에 확인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니, 역시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을 올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행주산성에 있는 행주대첩비에 올라 보면 하늘이 넓은 줄 알게 되리라. 넓은 평야, 한강,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산 위에서 보는 맑은날 하늘은 애국가 3절에서처럼 공활하게 보일 게다.

해발 124.8m 덕양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 행주산성. 산성 정상에서는 남쪽 한강변과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사진=고양사이버역사박물관 제공.>

행주치마의 유래가 깃든 호국격전지 행주산성은 덕양산의 능선을 따라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으로 임진왜란 때 거둔 행주대첩의 격전지로 유명하다. 3만여 왜군을 맞아 권율장군의 지휘 하에 관군, 의병, 승병, 여성들까지 모두가 하나가 되어 승리로 이끈 역사적 장소, 당시 부녀자들까지 앞치마에 무기 대신 돌을 날라 행주치마의 유래가 된 곳이기도 하다. 행주산성 입구인 대첩문을 들어서면 충장공 권율 장군의 동상과 그 뒤로 행주대첩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부조가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행주산성은 봄이면,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흐드러지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든 아름다운 산책길이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도 아름답지만 정상에서 바라다보는 한강과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덕양정과 진강정은 이러한 멋진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정자이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두 가지, 하나는 대첩기념관 쪽으로 가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행주산성 토성길이다. 정상에 오르면 1963년에 재건된 행주대첩비가 우뚝 솟아 있고, 박정희 전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행주대첩 당시 사용된 특별한 무기인 화차(신기진, 총통기)가 전시된 대첩 기념관과 충장사, 충훈정, 충의정도 행주산성을 걷다보면 만나게 된다. 매년 1월 1일 신년 해맞이 축제와 3월 14일엔 행주대첩제, 5월 행주문화제가 열린다.

한강은 한반도 중심으로 진출하기 위한 유일한 물길이었다. 그리고 서울지역 주민의 생명수다. 행주나루와 산성(山城)은 그 역사가 삼국시대를 거슬러 오른다. 한강이란 큰 강은 항시 한반도 역사의 초점이었다. 덕양산은 주변 평야가 훤히 조망되었다. 그래서 강 건너 개화산(서울 강서구)과 더불어 한강을 통해 진입하는 적을 방비하는 전초기지였다. 산성은 마을을 낳고 마을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사람들이 길을 트고, 그 길로 문물이 오갔다. 행주나루는 바로 그 한강의 길목에 있다.

강을 오갈 수 있는 나룻배는 유일 교통수단이었다. 강 건너편에서 ‘사공’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노를 저어 건너가 나룻배로 강을 건네주었다. 그때는 강폭이 지금의 절반정도여서 부르면 다 들렸다 한다.

군청에선 뱃삯을 5원만 받으라 했는데 배 만드느라 진 빚 갚느라 곱절로 받았었다는 이야기다. 뱃놀이 손님이 오면 산성 아래 절벽까지도 갔다 오기도 했다고 한다. 배타는 손님 중에는 부평장, 일산장을 옮겨 다니는 장꾼도 많았고, 강 건너 친정 다녀가던 새댁도 고객이었다며 소도 많이 태워 건네주었다 한다.

덕양정

행주나루 역사가 명을 다한 것은 1978년 행주대교 개통과 동시에 나룻배와 함께 사라졌다. 나루의 정확한 위치는 행주대교 북단 교각에서 상류쪽으로 400m쯤 떨어진 행주가든 식당아래 강변의 돌방구였다 한다. 당시 나루는 백사장이었는데 지금은 수중보 설치로 인한 수면 상승과 개흙 축적으로 사라졌다. 행주가든 주차장 입구의 ‘행주나루터’ 표식만이 나루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물이 되었다.

나루는 사라졌지만 빼어난 풍광은 그대로다. 행주산성 앞 한강에는 아직도 고기잡이 어부가 있다. 행주어촌계에서는 매일 그물과 통발을 던지고 있지만 요즘은 참게잡이가 시원치 않다고 한다. 그래도 철마다 웅어와 황복, 장어도 잡지만 예전만 못하고, 게다가 경인 아라뱃길 내면서 준설하느라 고기잡이는 더 어려워 졌다 한다.

행주나루, 행주산성과 더불어 이곳 행주의 역사를 간직한 곳은 설립 107주년을 맞은 행주성당(의정부교구)은 행주외동의 언덕 중턱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울대교구와 의정부 교구에서 명동, 약현성당(서울)에 이어 오래기로 세 번째라 한다.

행주산성을 찾았다면 한강이 내다뵈는 강변식당에서 장어구이 한번 맛보는 식도락은 참새방앗간 아닐까란 이야기도 회자된다.

행주대교 북단 강변에 들어선 ‘소애촌’ 식당가가 있다. ‘샛말’이라 불리는 이곳 장어식당촌 역사는 벌써 60년을 훌쩍 넘겼다는데…. 초창기엔 행주나루 어부가 직접 잡은 장어를 취급했는데 지금은 수질악화와 수중보 설치로 서해 장어가 이곳까지 오르지 못한 지난 30년 새 사정은 변했으나 장어는 외지 장어를 쓰면서 식당은 계속 늘어난다니 다행한 일이다.

강서구 가양동 한강 남쪽 지역 한강변 옛 나루터 중 서울 안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했던 공암나루터는 강화도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던 곳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이조년, 이억년 형제의 우애를 얘기하는 투금설화가 전해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