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재정이 20조원 넘는 누적 흑자를 달성하자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안병정 편집주간

어찌되었거나 건보재정이 수년째 유례없는 흑자를 이어온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곳간이 넉넉해지자 시민사회단체, 나아가 정치권 일각에서 “보험료를 내려야 한다거나, 누적 흑자 분을 가입자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와중에 보건복지부 또한 재정 흑자를 과실로 보는지 노인복지 유관사업이나 저출산 대책과 같이 예산확보가 어려운 것을 건보재정을 기반으로 하는 사업에 끼워 넣고자 하는 시도를 노골화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평소 기재부와 예산협상에 어려움을 겪어 온 복지부가 자칫 흑자로 조성된 건보적립금을 ‘눈먼 돈’인 양 ‘안 되면 건보’라는 식으로 안이한 발상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혹의 눈길이 쏠린다. 뿐 만 아니라 여론을 의식한 나머지 보장성 확대라는 명분으로 선심성 급여시책은 얼마나 더 만들어 낼지 이런 저런 우려가 나돈다.

엄밀히 보아 건강보험은 수입과 지출을 1년 단위로 맞추는 예산 개념의 ‘단기보험’이다. 그래서 수지 균형을 맞추는 게 원칙인데 지난 6년간 해마다 평균 3조원이 넘는 돈이 남아돈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재정을 잘 관리했기 때문이란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돈을 너무 많이 거뒀거나, 줄 돈을 제대로 안줬다’는 비판에 휘둘릴 수 있다. 그러니 재정당국으로선 저변의 불만이나 보장성 확대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여론을 무마해야 될 도구나 방법을 찾을 게 뻔하다. 한마디로 돈 쓸 용처를 찾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런 반면 건강보험의 절대적인 이해당사자인 의료계는 막대한 재정 흑자에 대해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평소 의료계는 낮은 수가로 병의원 경영이 안 된다고 기회 있을 때 마다 ‘수가현실화’를 요구해 왔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조용하다. 웬만하면 ‘뭉칫돈이 쌓인 것은 수가를 묶어 줄 돈을 안줬기 때문’이라며 ‘몫’을 요구할 법도 한데 말이다.

그렇다고 의료공급자 측에 돈 타령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건보재정의 흑자도 흑자지만,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을 논의 중이어서 시기적으로 매우 중요한 때다. 무엇보다 항구적인 재정안정화 기반을 마련하고, 건보수가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부분을 손보도록 요구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건강보험제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공급자 측의 권리이고 책무이기도 하다.

그동안 의료계는 ‘적정부담-적정수가-적정진료’를 줄기차게 요구해 왔지만 늘 좌절되곤 했다. 그러나 유례없는 재정 흑자기조가 이어지는 지금이야말로 수가구조 개편을 요구할 명분이 된다. 시기적으로도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이란 중요한 과제가 놓여 있어 기회이기도 하다. 다들 보험료를 내리자거나, 보장성을 확대해 달라는 요구를 하는데 의료계만 눈치를 보거나, 뒷짐을 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사실 건보 흑자시대는 얼마를 이어갈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또한 정부와 정치권이 건보료 부과체계를 어떻게 개편해 낼지 예단하기 어렵다. 여기에다 올해는 건보 국고지원을 규정한 법률안도 일몰 예정이라 이에 대한 논의도 어떻게 결판날지 막연하다. 한마디로 건보재정에 대한 미래가 불확실하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 그나마 건보재정이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지금 시간을 놓치지 말고 ‘적정부담-적정수가’ 체계로 의료공급자의 권익을 담보하며 지속가능한 건강보험의 틀이 유지되도록 정부와 여론을 설파하는 노력을 서둘러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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