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환경이 변화하며 그 동안 가족의 사적인 책임영역으로만 여겨졌던 '가족 돌봄'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 많이 변했다. 특히, 급속히 진행되는 우리 사회의 저출산․고령화는 아동과 노인 돌봄에 대한 국가와 지역사회, 기업 등 사회 전 구성원의 새로운 역할을 주문하고 있다. 요양보호가 필요한 노인은 급격하게 늘어나고 그 비용도 급증하고 있는데 반해, 핵가족화와 여성의 사회참여 증가 등으로 가정 내에서 이들을 요양보호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가족의 노인부양 부담을 줄이고, 고령화 사회로 급속하게 진전함에 따라 요양보호가 필요한 노인의 생활 자립을 지원함으로써 늘어나는 노인 요양비와 의료비 문제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 도입된 공적 제도이다. 2007년 4월에 제정되어 2008년 7월부터 시행된 이 제도의 실질적 지휘자는 박하정 전 보건복지부 실장(이하 'P' 전 실장)이다. P 전 실장은 지난 2006년 노인정책관(국장)으로 재직할 당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밑그림을 완성한 장본인이지만, 2006년 연말에 갑자기 후두암 진단을 받고 그 후 수개월간의 입원과 치료를 이어갔다. 병마를 극복한 그는 마침내 2008년 3월에 복지부 저출산고령사회정책국장으로 복귀한다. P 전 실장은 병이 완치되고 다시 복지부 본부에 복귀한다면 내 인생 후반전을 새롭게 출발하고 더 겸손한 자세로 후회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공직자의 길을 마치고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병마를 이겨낸 그는 이후, 2008년 12월 30일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 보임에 이어, 2010년 9월 3일부터 기획조정실장으로 등극, 실질적으로 복지부를 통할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 후 일 년이 지난 이명박 정부의 진수희 전 복지부장관 때 2011년 8월 옷을 벗고 복지부를 떠나게 된다.

필자는 그를 취재 현장이나 공․사석에서 많이 봐 왔다. P 전 실장은 행정고시(23회)를 거쳐 1981년 복지부에서 사무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후 올곧은 길을 걸어 온 모범적인 공직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조직에 업무기술서(mission statement)가 있듯이 개인도 임무기술서를 작성해서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는 책을 읽고서 복지부 고위공무원으로서 P 전 실장만의 ‘임무기술서’를 작성했다. 병상에서, 회복 중에 읽었던 책과 생각한 내용을 정리해 동료들도 국민을 섬기면서 칭찬 받는 더 유능한 공직자가 되는 길을 다짐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모든 국민의 건강과 복지, 그리고 사회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창의적이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복지정책의 설계자가 된다. 나는 많은 공무원들이 같이 일하면서 배우고 싶어하는 섬기는 리더가 된다”는 각오를 담고 있다. P 전 실장은 임무기술서에 ‘유능한 공무원(공직자)이 되는 길’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유능한 공직자가 되려면 우선 ‘기본적으로 전문지식과 경륜을 갖춰야 함'이 최고 덕목임을 역설한다. 정책결정에 관한 통찰력을 기르도록 노력하고, 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능력,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남이 생각지 못하는 창의적인 시각, 순발력 있게 문제에 대처하는 능력, 부하직원이 좁은 안목 때문에 보지 못하는 분야를 지적하고 시야를 넓혀주는 일 등이 해당된다. 또 인적네트워크가 공직자의 든든한 자산이라며, 공무원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기보다 국회(정당), 시민단체, 노사단체, 이익집단, 교수와 전문가 등 다양한 집단의 정책결정 참여가 증가되는 추세이므로 이들과 정보와 자원의 교환을 통해 이해를 증진하고 필요한 협력과 지지를 얻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공직자는 국민 다수를 위해 위임받은 공공의 일을 하는 것이므로 문서를 작성할 때나 대화를 할 때나 감정이나 직관에 의존하기보다는 명확한 논리와 명분으로 무장해야 하고, 정책 고객과 일선 현장에서 해답을 찾도록 하며, 정책 결정은 절차와 참여가 내용 못지않게 중요함을 주장한다. 여기에 타이밍을 맞추는 감각과 순발력으로 승부 하는 자세를 견지토록 해야 한다. 장관, 대변인을 비롯한 상․하간 형식에 관계없이 신속한 의사소통이 이뤄지게 하고 청와대, 사정기관, 여당을 비롯한 유관기관과의 정보 공유, 언론에 대한 대응 등이 동시 다발적으로 신속히 이뤄져야 한다. 조직을 통(通)하게 하고 매력 있게 보이도록 한다. 커뮤니케이션을 못하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다. 특히 중간 관리자인 과장급은 상․하를 잘 연결할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공무원 사회에서 사무관, 주무관은 치밀성, 과장급은 의사소통, 국장급이상 고위직은 방향성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공직자는 각종 규정제정 및 집행, 예산과 같은 행정력 뿐 아니라 기회제공, 정부위원회 참여, 정보 포상, 대통령 또는 장관 참석 행사 등 민간단체, 언론, 학계와의 업무협약 제휴, 캠페인 전개를 갖고 있다. 예산이 없다고 해서 사업을 못한다는 식의 생각은 문제가 있다. 공무원, 정부기관으로서 동원할 수 있는 다양한 자원과 영향력을 활용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P 전 실장은 미국 산호세주립대에서 보건행정학 석사, 경희대에서 행정학 박사를 취득했다. 그는 보건복지 분야 전반에 대한 전문성과 업무경험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암 투병을 이겨내고 복지부로 다시 복귀한 일화는 복지부는 물론 관가 주변에서 널리 회자됐다. 그 당시 복지부 관계자는 “P 전 실장이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용의 리더십 소유자로 의료현장 및 의료제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며 탁월한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보건의료의 질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적임자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P 전 실장이 필자에게 “공직자는 한 쪽만 취하고 다른 쪽은 버릴 것이 아니라, 균형감각을 갖고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핵심가치와 목적에 알맞게 현실의 여러 대립되는 부분을 융합하고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모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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