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경제학자들은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다는 명제를 제출해 왔다. 그러나 이 명제가 언제나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는 다양한 종류의 수요가 있다. 그 중에는 공급자 측에서 봤을 때 보상을 기대하기 힘든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수요가 너무 적고 분산돼 있거나, 수요자 측의 지불능력에 대한 신뢰가 낮다면 수요와 공급 사이에는 불일치가 나타난다. 이 수요가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에 근거하지 않고 심지어 엽기적일 때는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수요가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때는 누군가가 개입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서비스’의 개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전재희 전(前 )보건복지부장관(이하 ‘C 전 장관’)은 지난 2009년 7월 15일 ‘사회서비스의 전자이용권(바우처)의 관리 및 활용 규정’을 담은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C 전 장관은 기자브리핑에서 “사회서비스 관련 재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사회서비스 이용권을 효율적으로 관리․활용하기 위한 법적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이 법안을 마련했다”며 “현재 사회서비스이용권을 통해 제공되고 있는 사회서비스는 장애인활동보조, 장애아동재활치료사업, 지역사회서비스투자, 산모신생아도우미, 가사간병방문, 노인돌봄, 출산전 진료비 지원 등 7개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즉 C 전 장관이 사회서비스라는 용어를 정립한 장본인인 셈이다. 마침내 이 법안(사회서비스 이용 및 이용권 관리에 관한 법률)은 2011년 8월 4일 제정․공포된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사회서비스’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사회적으로는 꼭 필요하지만 수익성이 낮기 때문에 민간 기업들이 참여하지 않는 복지서비스’를 뜻한다. 여기에는 ‘보육, 가사, 간병, 간호, 노인수발서비스, 외국인주부, 저소득가정 아동․장애인 등에 대한 교육․문화․환경관련 서비스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렇게 볼 때 ‘사회서비스’는 과거에 가족과 공동체가 담당했거나 포기했던 ‘돌봄’ 중에서 시장이 흡수하지 않은 영역을 국가와 민간부문이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서비스’는 무상이 아니다. 반드시 본인부담금을 조금이라도 내야 한다. 그게 원칙이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라면 공짜는 없다. 정부가 19만원을 지원하면 본인은 1만원을 내는 식이다. 책임감을 부여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자긍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또 하나의 배려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사회서비스의 영역은 방대하다. 큰 항목만 해도 △가사간병방문 △노인돌봄 △장애인활동보조 △장애아동재활치료 △산모신생아도우미 △지역사회서비스투자 등이 있다. 인권이 강조되면서, 예전에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했던 것들을 권리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됐다. 삶의 질에 대한 관심도 뜨거워졌다. 이에 힘입어 ‘사회서비스’의 수요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며 또 다른 시장이 열렸고, 전통적인 복지 담론을 넘어서 ‘사회서비스’가 일자리 창출의 대안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을 보더라도, 보험은 시장논리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라 노환의 진행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하거나 본인부담금을 낼 형편이 못되는 취약계층 노인들의 수요에 대응하지 못한다. 이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즉 ‘돌봄’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추진했던 게 ‘노인돌봄서비스’다. 국가가 민간부문과 손을 잡고, 가족과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돌봄’의 공간을 메우는 것, 그것이 바로 ‘사회서비스'이며, 이를 통해 시장의 사각지대를 보완한다.

‘발달장애아동서비스’가 취약했던 10여 년 전에는 아이들을 맡길만한 시설이 거의 없었다. 재력을 갖춘 부모들은 전문가를 고용하거나 시설이 완비된 외국으로 아이를 보내겠지만 그렇지 못한 엄마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시설을 짓고 전문교사를 배치하는 게 가장 좋겠으나 예산으로는 감당할 수도 없으려니와 절차도 복잡해서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 세월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음)’이다. 발달장애아동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도 아니다. 면 단위로 가면 한 명, 두 명이다. 이럴 때 ‘사회서비스’가 해법이 될 수 있다. 정부가 엄마들에게 일정액을 지원하면, 엄마들이 그 돈을 모아 전문교사를 고용해 아이들을 맡긴다. 장소는 지자체의 힘을 빌리거나 민간단체의 후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회서비스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 국회의원 한 명이 국정감사에서 이런 사업에 예산을 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엄마들은 가슴을 쳤다. 이제 겨우 아이들을 돌볼 교사를 구했는데 이걸 반대하면 어떻게 하느냐! 분노한 엄마들은 그 국회의원 사무실로 쳐들어갔고 그 서슬에 놀란 국회의원은 곧바로 자신을 주장을 철회했다. 발달장애아동처럼 숫자가 많지 않고 특수한 경우에는 정부가 시설투자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 주의를 환기시키기 않으면 그 절박함을 알지 못하고 정부가 그냥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사회서비스’는 사회적 약자들의 피부에 와 닿는 복지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성과를 보지 못한 사회서비스 영역도 존재한다. 비만은 세계적 이슈인데 미국이나 멕시코, 브라질 같은 ‘비만국가’들이 비만 퇴치에 쓰는 돈이 1년에 수백억 달러에 달한다. ‘아동비만관리서비스'는 간호대학에서 이뤄졌는데 실행이 정말 힘든 서비스이다. 일단 먹는 것을 최대한 줄이고 운동량을 늘리는 프로그램이니, 이성을 통해 통제되기보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기 쉬운 아동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이들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고, 아동들을 채근하고 쫓아다니다가 프로그램 운영자들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요즘 부자들 중에는 뚱뚱한 사람이 없다. 체질적으로 타고났어도 어떻게든 관리를 한다. 이 점을 파악하지 못한 몇몇 장애아동 부모들이 ‘지가 잘 먹어서 뚱뚱해진 거 왜 정부 돈 들여 고쳐주느냐며 집단적으로 항의를 한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소중한 만큼 타인의 아이도 소중하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가짐이 나타나기에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우리사회의 단면이다. ‘돌봄’에 빈틈이 없을수록 개인이 누리는 ‘삶의 질’의 격차는 줄어든다. 이것이 사회를 더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돌봄’에 빈틈이 없으려면, 국가의 개인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공동체가 복원돼야 한다. ‘지역사회서비스투자’는 ‘돌봄’을 매개로 지역사회 구성원들에게 연대감을 불어넣고 일자리를 제공해 자립의 싹을 심는다. ‘사회서비스’야 말로 공동체를 살찌우는 길이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