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태
고려대 소아청소년과 / 의사평론가

주말이라고 늦잠자고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가 밖을 내다보니 햇볕이 쨍쨍하다. 바람 좀 쐴까하고 차를 몰아 자유로를 달려 시골집에 내려왔다. 서울은 비교적 날씨가 따뜻했는데 이곳은 북쪽이라 기온이 4도 정도 낮다.

바람이 좀 차지만 그래도 얼었던 땅이 조금씩 녹은 흔적이 보인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오랜만에 만난 동네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차도 한잔 얻어 마시고 잡담을 하다 보니 밤이 깊었다. 간만에 구름 사이로 별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한다. “시간을 내서 좀 더 자주 내려와야 하는데…” 그렇지만 매번 생각뿐이다.


누군가 현관을 톡톡 불규칙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아침잠을 깨어보니, 현관문 긴 손잡이 위에 조그만 새가 두 마리 앉아서 유리창을 쪼고 있다. 참새인가? 아니다 박새인가? 잘 모르겠다. 새에 대해 공부 좀 해야할 모양이다. 조금 떨어진 나뭇가지 위에는 산비둘기 두 마리가 앉아서 이쪽을 내려다보며 먼저 온 손님이 떠나길 기다리고 있다. 쟤네들이 내가 온 것을 어떻게 알았지? 매번 올 때마다 마당에 조금씩 뿌려주던 새 먹이를 찾아 먹던 친구들인 모양이다. 내 차가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일찍부터 모이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 같다. 집에 내려올 때마다 새들을 위해 마당에 모이를 조금씩 뿌려 줬는데, 어느 날인가 모이를 쪼는 새를 도둑고양이가 덮쳐 물고 가는 것을 본 후부터는 현관 높은 곳에 접시를 매달고 모이를 주었다. 이번 겨울에는 아내의 발 수술로 출입이 자유롭지 않아서 한동안 내려오지 않았었는데 그동안에도 새들은 아침마다 우리 집 모이 그릇을 한번 씩은 점검하러 왔던 모양이다. 때마다 비어있는 그릇을 보면서 ‘야속하다고 생각했겠지…’ 하면서 그릇을 채워주고 아침 산책을 나선다.


버들강아지가 눈을 뜬 모습이 보이고, 임신한 듯 배가 잔뜩 부른 고양이가 크게 기지개를 켜며 ‘너는 뭐하는 놈이냐?’ 는 표정으로 날 째려보더니 유유히 길을 건너 지나간다. 약간 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며 빠른 걸음으로 마을을 도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라 나와 다니는 사람은 없다. 한 시간쯤 걸으니 등에서 조금 땀이 나기 시작하는데 아까와는 달리 바람이 점점 세지고, 차가와진다. 하늘도 점점 어두워지는 것으로 보아 눈이나 비가 내릴 모양이다. 전화기를 꺼내 날씨를 점검해보니 오후부터 눈 또는 비가 온다고 한다. 현재 온도는 영상 2도이니 눈이 와도 쌓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모자도 쓰지 않고 나왔으니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고 속도를 높인다.


아침 커피 끓이는 냄새를 맡으면서 창밖을 보니 임진강 위쪽으로 새들이 줄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 철새가 돌아갈 때가 되었나보다. 가볍게 늦은 아침을 먹고 창 앞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데 눈이 침침해 지는 느낌이 온다. 왜 이렇게 어두워지지 하면 서 창밖을 보니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내일이 2월 마지막 날인데 웬 눈이 이렇게 펑펑 쏟아지나…’ 하는 생각을 해보며 인터넷을 찾아보니 기상청 관측 이후 5월 중순에도 눈이 내린 기록이 있다고 한다. 내 생각과 달리 3월에는 서울에도 제법 자주 눈이 온다고 한다.


멀리 보이는 임진강을 따라 죽 쳐진 철조망 저쪽 개성 땅에도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어제 밤에 보니 그쪽에는 불빛조차 없었는데…. 마을 사람들 말로는 개성공단 철수 후 단전 단수로 인해 적막강산이 되었단다.


아마도 이 겨울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눈이 펑펑 내려 철조망 이쪽과 저쪽을 모두 하얀 세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세상의 색깔은 흰색 하나인데 철조망 양측에 냉랭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 쌓인 눈 위로 화해와 평화의 봄바람이 불어왔으면 좋으련만, 지난 며칠 동안 150만 명의 북한 젊은이들이 김정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군에 입대하였다는 뉴스를 접하니 기분이 착잡하다. 갑자기 증가한 150만 명의 군인을 먹일 식량은 가지고 있으면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찬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눈은 끊임없이 세차게 내리고 있다.
2016년 2월 28일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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