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이혁 전 보사부장관·우강 건강포럼 대표

▲ 신노인회 회장실에서 (오른쪽부터) 히노하라 선생과, 필자 그리고 이명묵 박사와 기념촬영 모습.

2016년 2월 4일부터 9일까지 일본 동경(東京)을 방문했다. 오래간만의 해외여행이었다. 보행이 어렵게 되면서 여행을 삼가다보니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나 혼자만의 여행은 불가능한 상태이며,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하니 참으로 답답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나와 함께 성북동 집에서 살고 있는 둘째딸 내외와 가족들이 설 연휴를 이용해 동경에 간다고 해 나도 끼워달라고 한 것이다. 10명으로 구성되는 4세대 가족여행은 이제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동경에서의 하이라이트는 2월 5일 이루어진 105세의 현역의사 히노하라 시게아끼(日野原重明)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둘째사위 이명묵 박사와 함께 신노인회(新老人會, Society of New Elder Citizens) 사무국을 방문했다.

회장실에서 대기하고 계시던 히노하라 선생이 매우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히노하라 선생과 이 박사는 다 같이 심장내과 학자다.

105세에도 매주 2회 진료봉사

히노하라 선생은 1911년생이니 나보다 12세 연상이시다. 1937년 동경대학 의학부를 졸업했고 1941년 성누가국제병원(일본에서는‘聖路加國際病院’이라고 함) 내과의가 된 후 생애를 이 병원에 바치다시피 했다. 이 병원의 원장으로서 병원 발전에 기여했다. 현재는 성누가국제대학 명예이사장·성누가국제병원 명예원장·신노인 회장·라이프 프란닝 센터 이사장 등으로서 활약하고 계시다. 105세의 고령임에도 1주일에 두 번은 병원에 출근하여 진료를 한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히노하라 선생은 250권이 넘는 저서를 냈는데, 그 중 150여권이 베스트셀러라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나도 저서 중 10여권을 구입해서 읽어 봤다.

‘신노인(新老人)을 산다’ ‘인생의 사계(四季)를 산다’ ‘어떻게 잘 살고 어떻게 잘 늙고 어떻게 잘 죽는냐’등이 매우 인상적이다. 언제나 이 책들을 침실 책꽂이에 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읽는 습관이 있다.

회장실에서 두 시간 가까이 대담한 후 식당으로 옮겨가서도 두 시간 넘게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회장실에서 ‘전쟁과 생명과 성누가국제병원 이야기’라는 최근의 저서를 선물 받았다. 동경에 있는 동안에 이 책을 독파했는데 전쟁의 참사 특히, 동경 대공습 때의 경험 등을 묘사한 표현은 실감이 날 정도였다. 전쟁은 다른 사람의 가치관과 존엄을 부정하고 사는 권리를 폭력으로 탈취하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당연한 정신을 마비시키는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히노하라 선생은 현 일본정부의 평화헌법 개헌을 적극반대하고 있다.

저서 250권 중 150권 베스트셀러

‘성누가국제병원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줬다. 히노하라 선생은 제1차 세계대전, 일중전쟁, 태평양 전쟁에서 수백만명이 생명을 잃은 사실을 잘 봐왔으며, 청춘시대의 대부분을 전화(戰火)속에서 보냈다.

▲ 성로가병원 앞에 서 있는 필자. 병원 탑옥에 십자가가 있다.
성누가국제병원은 미국 루돌프 B.토이스러 박사가 개설한 병원이며, 111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개원 당시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고 미국의사·간호사들이 일본의 의료향상과 간호교육 발전에 이바지 한 병원이다.

성누가국제병원의 본관은 6층 건물인데 옥상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탑옥(塔屋)이 높이 솟아 있는 당당한 건물이다. 주위의 낮은 건물들이 많기 때문에 그 높이가 대단히 크게 보였으며 ‘백아(白亞)의 전당(殿堂)’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현관에 들어서면 천정이 높은 차벨(예배당)이 있어서 병원이라고 하기보다 교회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성누가(聖路加)’는 성인(聖人) 루카(St. Luke)를 말한다. 성인은 기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제(救濟)정신을 깊은 신앙심을 통해 전달하는 현자(賢者)를 말한다. 신약성서에는 수명의 성인이 등장하는데 루카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루카는 의사였던 까닭에 ‘성누가’를 병원명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성누가국제병원’의 영어명칭은‘St. Luke’s Inter-national Hostpital ’이다.

美 토이러스박사가 개설·운영지원
토이스러씨는 1900년 24세 때 부인과 함께 당시 외국인 거주지였던 쓰키지아카시쬬(築地明石町)에 작은 성누가진료소를 만들었다. 이것이 ‘성누가병원’의 시작이다. 성누가국제병원이라고 개칭된 것은 1917년이다. 토이스러 원장은 모국인 미국 각지의 미국성공회(美國聖公會)를 찾아가 병원건축 기금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미국성공회로부터 장기간에 걸쳐 원조를 받게 되어 성누가국제병원은 크게 발전했다. 토이스러 원장은 의사 뿐 아니라 간호사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간호부(看護婦) 양성학교도 만들었다.

1923년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가 발생해 병원 건물은 전소해버렸다. 당시 미국에 가있었던 토이스러 원장은 잘 알고 지내던 미육군성의 퍼싱 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미육군성은 육군부대를 동원해 수십장의 천막병원을 만들었다. 천막병원이지만 병상수가 225개이고 수도·검사기계도 완비되어 있었다. 그 후 철골콘크리트 6층의 건물이 건축되었다. 이 건물에서 진료가 시작된 것은 1933년인데 태평양전쟁 중에도 끄덕없이 잘 이용되었다. 그러나 토이스러 원장은 1934년에 별세했다.

미성공회는 인재(人材)와 다액의 보조금으로 병원을 지원했다. 그런데 일중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일본을 위험한 나라로 보기 시작했다. 일본도 미국을 색안경으로 보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이 발생하기 전해인 1940년부터 병원에 대해 일본정부의 압력이 시작됐다. 성누가병원이라는 명칭이 기독교에 유래한다는 사실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미국인의사들과 직원들이 일본인들로 교체되었다. 주일 미국대사를 비롯해 많은 외국 외교관들과 외국인들이 이 성누가국제병원을 이용했지만 병원은 점점 적대시되고 히노하라 선생은 스파이 용의자로 요주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사상범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고등경찰(特高)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병원의 명칭도 ‘대동아중앙병원( 大東亞中央病院)’으로 개칭되었다. 병원 탑옥의 십자가도 폭격의 목표가 된다는 이유로 철거됐다.

병원 내에서는 적국어 즉 영어사용이 금지됐다. 히노하라 선생의 ‘성가로병원이야기’에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담겨있는데 여기서는 생략한다.

태평양 전쟁, 성누가 역사 바꿔

일본의 식민지에서 일본제국주의나 군국주의를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 책에 쓰여진 내용들이 잘 이해된다. 서울의대 학생시절 대한협동당(大韓協動黨) 사건으로 피신했다가 해방을 맞이한 체험이 떠오르기도 했다.

히노하라 선생의 저서 중 필자가 언제나 침실 책꽂이에 꽂아 두고 틈틈이 읽고 있는 책 가운데‘新老人을 산다(新老人を 生きる)’‘어떻게 잘 살고, 어떻게 잘 늙으며, 어떻게 잘 죽느냐(どうよく生き どうよく老い どうよく 死めか)’가 있는데, 이 책들 속에는 필자가 잘 애용하는 소위 ‘인생 슬로건’이 될 만한 문장들이 상당히 많다.

히노하라 선생은 임상의사로서 자신이 체험하신 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시기 때문에 문장하나 하나에서 ‘진실’을 볼 수 있다. 가끔 세계적 유명인들이 남긴 격언(格言)이나 명언(名言)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선생자신이 대단한 독서가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히노하라 선생은 2007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 오셔서 강연하신 바 있다. 첫 번째 강연회는 지난 2007년 10월 1일 오후 2시부터 잠실 롯데호텔 그랜드볼룸에서 “빛나게산다-자신의 살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디자인 하느냐”라는 제목이었는데 800명 좌석을 마련했었지만 1000여명의 청중이 모여들어 준비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던 일이 생각난다.

1차 강연은 차흥봉 한림대 교수(전 복지부장관·제20차 세계노년학·노인의학대회 조직위원장)와 김삼수 성애병원 심장병센터소장이 주도했다.

히노하라 박사, 한국 두 번 방문 강연에 앞서 12시에 히노하라 박사, 요시다 레이조(吉田禮三) UNICEF 자문관 겸 신노인회 미국지회장, 이와시미즈 유키코(石淸水由紀子) 신노인회 사무국장, 고 주근원 명예교수, 차흥봉 교수, 김삼수 박사, 박상철 교수, 필자 등이 잠실 롯데호텔 중국식당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우강에세이 제III집‘마이동풍’신원문화사, 2008년. 68쪽 참조)

두 번째 강연회는 2009년 11월 5일 오후 3시에 롯데호텔에서 100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늙지 않고 잘 사는 법, 행복한 인생을 위한 나의 메시지’를 주제로 열렸다. 이 강연회는 이길여 가천대(당시는 경원대)총장과 박상철 교수(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장)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는데 때마침 신종플루가 유행중이어서 대중 강연대신 100명의 청중만을 초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강연에서는 일본이 직면하고 있는 고령화문제, 100세 이상 장수자의 숫자변화, 신노인회, 노화의 원인, 인간의 영혼성(sprituality) 등이 중심이었으며, 자신의 일상생활과 건강상태를 소개하기도 했다.(우강에세이 V집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자’ 신광출판사, 2010년, 142쪽 참조)

두 번에 걸친 강연이 각각 2시간 계속되었는데 (강연 한 시간, 통역 한 시간), 두 시간 동안 히노하라 박사는 꼿꼿이 서서 물도 마지지 않고 그야말로 직립부동의 자세로 서고 계신 모습을 보고 대단히 놀랬다. 90을 훨씬 넘으셨는데 어떻게 움직이지도 않고 강연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90세 넘어서도 직립부동 강연
선생은 여러 신조어(新造語)를 만들기도 했다. ‘노(老)’자가 늙는다는 뜻만이 아니라 존경받는 지혜자(知慧者)를 뜻하는 글자이기도 한 까닭에 선생은 ‘노인’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노인이란 단어를 싫어하며 65세에서 74세까지의 노인을 ‘전기고령자(前期 高齡者)’로 75세부터를 ‘후기고령자(後期 老齡者)’로 하고 있다. 그래서 선생은 75세 이상을 ‘신노인(新老人)’이라고 부르고 신노인회를 만들고 회장직을 맡고 있다. 신노인회의 기본이념을 사랑·인내·창조에 두고 있다.

히노하라 선생은‘성인병’을‘생활 습관병’이라고 개칭하셨는데, 현재는 많은 의사들이 애용하고 있다‘. 생활습관병’도 히노하라 선생의 신조어이다.

뿐만 아니라 히노하라 선생은 작곡가로서도 유명하며, 선생이 만든 뮤지컬이 여러 곳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히노하라 선생이 음악요법(音樂療法)의 창시자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현재 음악요법연맹회장으로서 존경받고 있다.

‘불 세출’ 인물 만남자체가 감동

필자는 히노하라 선생과 같은 다재다능한 분을 만난 일이 없다. 의사·작가·음악가·평론가로서 국제적으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 선생이 외에는 있는 것 같지 않다. 필자는 선생과 대담하는 동안 참으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어떻게 선생과 같은 인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 의아스러움은 지금도 떨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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