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주현
서울시의사회 홍보이사 겸 대변인

20년 전 대학 강의실에서 한의학 교수님을 외부 강사로 모시고 수업을 들었다. 주제는 ‘한의학적 항암치료’였다. 기존 항암제의 각종 부작용을 극복한 한방 항암제를 개발하셨다고 했다. 예컨대 암환자들이 항암제 치료 후 탈모 증상으로 고생하는 것 등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서울의대생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항암제의 과학적 원리가 분열이 빠른 세포증식을 막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모낭세포나 혈액세포 등 정상 세포도 손상되는 것인데, 부작용을 줄였다면 항암제로서의 효과가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누구나 생각할법한 질문임에도 결국 만족스런 답변을 듣지 못해 의아했던 것으
로 기억한다.

10여 년 전 공중보건의사로 지역에서 한의사 선생님들과 함께 일했다. 요실금과 자궁염을 앓고 있던 30대 여성이 응급실로 실려 왔다. 심한 자궁 탈출로 인해 응급수술이 필요해 보였다. 수술이 가능한 곳으로 이송 의뢰서를 쓰고 있는데 동료 한의사 분이 넌지시 보더니 한 말씀했다. “그거 기(氣)를 위로 올리는 약을 쓰면 되는데.” 경황이 없던 지라 한 귀로 듣고 흘렸는데 근무가 끝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유사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 중에 정말로 ‘그런 약’을 먹고 있는 사람이 있을 법 했다. 안과의사로 일하며 녹내장, 안구 건조증, 각종 만성 질환 등에 대해 한의학적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분들을 만날 때마다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의학적 진실과 환자의 자유로운 선택 사이에서 고민하는 날이 많았다.

요즘 한의사들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요구를 접하며 새로운 궁금증이 일었다. 10년 전, 아니 최근까지도 한의사들은 환자들 앞에서 주장을 내세우는 데 거침이 없었다. 비록 비과학적이거나 혹은 검증 받지 않은 지식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그랬다. 그런데 갑자기 한의사들이 현대의료기기를 쓰겠다니? 그래야 한방이 과학화가 될 수 있다고? 허준이 놀라서 관에서 뛰어나올 일이 아닌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한의학계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자신 있게 현대의학의 각종 한계를 넘어설 것처럼 말하던 한의학계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한의학으로서의 정통성을 외치며 한방 치료의 우월성을 말하던 한의사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그분들이 여전히 한의학계에 중진, 원로로 계시다면, 한의사들 스스로 한의학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어째서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는 것일까? 혹시 눈앞의 이익을 위해 갈택이어(竭澤而漁)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다머(Gadamer, H.G.)에 따르면 의학은 현대적 사유 양식으로는 개념을 파악할 수 없는 특별한 종류의 실천적 과학이다. 지난 세기 현대과학이 알아낸 사실 중의 하나는 절대 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은 반증이 가능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맥락과 체계에서만 진실로 받아들여진다는 패러다임 이론이 보편화 되었다.

결론적으로 체계 내에서 받아들여지는 상대적 진리이자, 언제든 반증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현대적 의미의 과학이다. 전일적 통합성을 중시한다던 한의학이 엑스레이와 초음파를 사용하여 과학화하고, 현대의학이 된다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얘기들을 접하면서 한의사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정말로 한의학에 무슨 일이 생기기나 한 것인지가 몹시 궁금해졌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