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준
한림의대 내과 교수
시인·의사평론가
건강하면 피부가 반질반질하고 매끄럽다. 습도가 떨어지고 피지의 분비가 쇠약해지면 거칠어지고 주름져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기도 한다. 피부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 안에 싸인 몸속의 이상이 살갗에 드러난 것이다.

실제로 당뇨병, 갑상선기능 이상 등과 같은 내분비 대사 질환에선 피부 변화만으로 진단이 가능한 경우가 드물지 않다.

몸속의 포도당 대사가 원활하지 못하거나 갑상선 기능이 흔들릴 때엔 피부의 윤기부터 사라진다.

윤기를 이야기하니 도자기 굽기 체험을 했던 기억이 난다. 흙을 반죽하여 물레 성형으로 굽깎기를 하고, 애벌 재벌구이를 거친다. 물레로 도자기를 빚는 일은 중심잡기부터 시작한다. 페달을 밟아 가며 속도를 가다듬어 가며 왼손으로 받치고 오른손으로 힘을 밀며 중심을 잡아간다.

초벌 된 도자기를 성형한 후에 사포로 스펀지로 정성껏 갈아내고 닦아낸 후 유약을 바르고 재벌을 굽는다. 도자기의 강도와 광택을 결정짓는 유약치기는 도자기가 도자기답게 쓰이는데 무리가 없게 해주는 과정으로 유약에 담갔다가 빼내며 온 정신을 모아 정성스레 발라준다. 이후에 1300도 이상의 고온을 견뎌내며 하나하나 구어 내는 가마와 도공의 정성이 보태어져 쓸모 있는 윤기로 빛나게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반지랍고 매끄러운 살림살이는 윤기가 난다. 윤기는 살림살이의 가격과 관계가 없다. 세월의 길고 짧음과도 무관하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바지런하게 꾸리며 사는 이의 세간은 윤기가 흐른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수없는 윤기 활성 비법들의 핵심은 결국 안팎의 튼튼함이다. 영양과 운동과 감사와 위로 등을 통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이 나날의 윤기를 가져온다.

해가 바뀐다고 누구나 다 똑같은 새해를 맞는 건 아니다. 달력은 모든 이에게 정월 초하루를 공평하게 알려 주지만 몸과 마음 안팎의 사정에 따라 정월이 정월 같지 않고, 새해가 새해 같지 않은 경우가 있다.

새로운 해가 떠도 별로 윤기 나는 변화의 기미가 없을 것이라 지레 짐작하여 시큰둥하다. 왜 새해가 새해답지 않을까?

다양한 원인 중에서 착각, 그 중에서도 ‘자신감 착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체스 점수측정 시스템은 완벽할 만큼 정확한데, 실제 체스게임에 참여한 선수들에게 물어보면 75%가 진짜 자신의 실력보다 점수가 낮게 나왔다고 답변한다.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 즉 자신감 착각은 ‘슈퍼스타 케이’ 같은 리얼리티 쇼의 오디션에 예선통과도 못할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현상을 설명해준다. 자신감은 상황에 따라 탄력적이다. 미숙한 사람일수록 실력과 자신감의 격차가 크고 지식이 늘면 격차가 준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대니얼 사이먼스/김명철 옮김, 김영사)

자신감이 넘쳐 세월의 바뀜이 안중에 없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앞서 나아가 해 바뀜이 무의미한 것이다. 이럴 때엔 잠시라도 머물러 스스로 돌아보는 게 지혜롭다.

진지한 멈춤은 자신감을 쓰다듬어 세월의 변화를 제대로 볼 수 있게 중심을 잡아준다. 오늘보다 나은, 지금보다 나은 다음을 감당할 수 있는 기력을 양손으로 받치고 밀며 중심을 맞추어 준다. 이렇게 하면 그 중심에서 단단한 광택이 우러나와 윤이 빛난다.

그동안 의료계나 의학계는 첨단연구와 기술로 진화, 발전한다고 하지만 의료사회는 여전히 내일을 예측하기가 만만치 않다. 외형적으로 발전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빈 강정인지, 조직이나 시스템의 경직인지 소위 의료선진국이란 나라에서 메르스와 같은 미증유한 사태를 경험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원격의료 허용,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사용과 같이 쩍지게 상대해야할 거센 문제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모든 문제에는 항상 해결책이 따라 오기 마련이다. 문을 만들어 달면서 열쇠를 함께 꾸리지 않는 법이 없다. 열쇠를 잃어 버렸거나 바뀌었거나 아니면 망가져 맞지 않을 뿐이다. 우선 새롭게 밝아 오는 세월에 가장 편한 자세로 몸을 얹고 과연 의료의 기본을 어떻게 추구하고, 얼마나 윤기가 흐르게 할 것인가를 저 중심부터 바라보면 제 열쇠를 구할 수 있고 제대로 고칠 수 있다.

한 가지 만이라도 속 끓여 도자기처럼 단단한 윤기를 낼 수 있다면 오늘의 문제는 오히려 감사의 제목처럼 여겨진다. 다름 아닌 알맞는 자신감이다. 순리대로 작동하는 자신감의 열쇠는 판단을 올바르게 열어준다. 적절한 자신감엔 착각이 없기 때문이다.

올해의 윤기는 바로 지금 자아내는 에너지로부터 광택을 마련한다. 현재를 걱정하는 이는 바보요, 미래를 근심하는 이는 더 바보요, 과거를 되짚는 이는 가장 바보라 한다. 2016년 병신년(丙申年)은 붉은 원숭이해다. 붉게 타오르는 열중으로 손질하고 간수한다면 모든 날들이 윤기를 더할 것이다. 동녘에 마땅한 자신감의 새해가 새해답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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