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훈
- 대한의사협회 고문
- 별빛문학회 회원
1475년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 카프레세에서 은행가인 로드비코 아버지와 프란체스카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에 들어가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나 부친은 가문에서 예술가가 나온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라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아들의 희망을 꺾기 위하여 매질까지 했지만 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나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아버지는 12살 된 아들을 데리고 친구 화가에게 부탁을 하였다. 15살이 될 즈음 피렌체의 최고 재력가인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고 그림, 조각 학교에 들어갔다. 천재의 재능은 일찍 발견되었으며 그 후에 많은 수련을 쌓았다.

그는 조각가이며 화가, 건축가이며 철학가 그리고 시인으로 활동했던 천재 예술가였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은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에 걸쳐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아 왔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훌륭한 작품 전기가 2편이나 출판된 최초의 예술가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와 두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주역들이며 다빈치가 20여년 차이로 선배였으나 서로들 견제하는 라이벌 상태였으며, 둘 다 결혼을 하지 않았고 일생동안 혼자 사는 독신으로 미켈란젤로는 89세까지 장수하였다.

그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으로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1508~12)를 그렸다. 무려 4년여 동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거의 누운 자세로 천장화를 그리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어느날 천장의 모서리 부분에서 정성을 들여 그림을 그려 나가는데 한 친구가 “여보게, 그렇게 구석진 곳은 잘 보이지도 않는 인물 하나를 그려 넣으려고 그 고생을 한단 말인가. 얼굴이 제대로 그려졌는지 누가 알기나 한단 말인가. 대강대강 하게나”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즉시 “그거야 내가 알지 않나”라고 대답하고 작업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천장 높이가 20m 넘는 높은 작업대를 세우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정성들여 그리는 그림은 정말로 힘들었다. 때로는 작업대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다니고 목을 뒤로 젖히다 보니 허리가 뒤틀어져서 아팠고 구부려 작업하다 보니 관절염이 생겼으며 염료가 눈과 얼굴, 몸에 떨어져 눈병과 피부병이 발생하였다. 천지창조 그림은 어렵게 완성되었으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매우 심하여 오랫동안 고생하였다고 한다.

언젠가 그에게 제자들이 “스승님이시여 어떻게 다비드 같은 작품을 창조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미켈란젤로는 “창조라니? 다비드는 이미 대리석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네. 나는 대리석 안에 들어있던 다비드를 꺼내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들을 깎아냈을 뿐이라네”라고 겸손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조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대리석 안에 다비드를 만들어 놓으셨고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우리는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는 일만 한다고 하며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표현하였다.

▲ 최후의 심판
교황은 그에게 전통적인 종교주체인 최후의 심판벽화를 요청하였다. 그는 우선 비밀리에 작업을 할 것이며 작품이 4분의 3정도가 진행됐을 때 공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교황에게 요청하였는데 화가의 천재적 예술성을 존중한 교황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작품이 3/4정도가 진행되었을 때 교황과 수행원들은 그림을 보고 많이 놀랐다고 한다. 그가 그린 최후의 심판 벽화는 그들의 시각으로 볼 때 너무나 못마땅한 점이 많이 있었다. 이 작품에는 옷을 벗은 나체의 군상이 너무 많았고 당초 그림 취지와는 달리 이단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고 시비를 걸었다. 교황청의 체세나 추기경은 교황의 예배당 같은 신성한 장소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대중목욕탕이나 술집에 어울리겠다고 혹평을 하였다.

처음 공개 당시 말이 없던 교황도 나중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쫒아 외설적이고 불결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직자와 교황청 관료들 성인, 성녀들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이 거의 다 알몸 나체인 것을 보고 경악하여 그림을 당장 치울 것을 요구하였으나 미켈란젤로는 “교황께서 먼저 세상을 바로 잡으시라고 전하게. 그러면 저까짓 그림 따위야 저절로 바로 잡힐테니까”라고 수정 거부의사를 정중하게 말했고, 죽기 한 달 전까지도 허락하지 않았다. ‘최후의 심판’(1536~41)은 종교개혁으로 기독교가 매우 혼란한 시기에 그려진 명작으로 그림 중앙상부에는 예수님과 성모마리아, 제자들, 그 주위에 성인들과 천당에 온 많은 사람들, 왼쪽 하부에는 지상에서 천당으로 올라가는 많은 군중들, 그리고 오른쪽 하부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군중들과 지옥에서 고통 받는 무리들 등 그림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391명이 그려진 대작이었다.

성인중의 한사람 바르톨로메오는 로마시대 기독교를 믿다가 산채로 피부 껍질이 벗겨지는 잔혹한 형벌을 당한 성인으로서 신앙심이 깊었던 미켈란젤로는 성인의 껍질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어서 성인과 자신을 동일시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당시 그의 최후의 심판 그림을 혹평하며 괴롭혔던 교황청의 체세나 추기경은 지옥의 맨 하단부에 그려져 있고 뱀에 감긴 나체 모습이며 뱀으로 하여금 그의 성기를 물게 하여 거세시킨다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추기경은 예술가의 장인정신을 잘못 건드리고 악평을 하고 다니다가 지옥에 그려지는 수모를 당하였으며 명화 속에 얼굴이 그려지는 복수를 받았고 그로 인해 그의 이름과 얼굴은 역사에 오래 남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사망 직전 교황은 수정명령을 내렸으나 위대한 예술가의 그림을 감히 수정할 화가가 없었다. 미켈란젤로의 제자 중 한명인 볼테라에게 노출이 심한 인물에 대한 옷을 입히라고 명령을 하였지만 볼테라는 스승님의 원작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하여 성기노출 부위만 가리는 작업을 하였다. 나중에 사람들은 볼테라를 ‘기저귀 그린 화가’라는 별명을 붙여서 조롱을 하였다.

미켈란젤로는 고집이 유난히 세고 타협을 모르고 자존심이 강한 예술가였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남이 보든지 말든지 자기가 맡은 일만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며 자존심이 강한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승화시키면서 인체를 생명력이 넘치게 미화시키며 자연적이고 아름다운 누드화를 그리는데 정열을 쏟아 부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불란서, 독일 등 수많은 나라에서 많은 예술가들과 유명 화가들이 견학 오면서 위대한 예술가의 초인적인 작품에 감탄을 하였고 초창기 작품으로 원상 복원하도록 진정하였다고 한다.

20세기에 들어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최후의 심판’ 작품을 원래 상태로 복원할 것을 허락함으로써 그의 의도대로 덧없는 가치에는 눈 돌리지 않으며 영원한 형태인 자연스러운 성인들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고 이 작업이 마무리되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던 날에 교황은 그의 위대한 예술성을 찬양한다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다이아몬드나 사파이어, 루비 등을 보석이라고 하는데 예술은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다(The art is the finest jewel). 예술도 보석이라고 한다면 위대한 예술가는 더 가치가 있는 보물일 것이고 더 나아가 위대한 예술적 명작을 이해 못하고 외설적이라고 비평하는 교황과 추기경에 대하여 벽화를 수정하지 않은 미켈란젤로의 자존심 예술가의 장인정신은 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여긴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