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자의사회 공보이사
우리나라 국민은 좀 특이하기는 하다. 요즘은 노래방에 갈 기회가 별로 없지만 갈 때마다 참 신기한 점은 모두가 노래 한두 곡쯤은 아주 멋들어지게 부르는 것이다. 옛 고전에 가무를 즐기는 민족이라더니 우리의 케이-팝이 세계에서 인기를 누리고, 비보이들의 몸놀림이 세계 각국 경쟁자들에 비해 월등한 실력인 것을 보면, 참으로 흥이 많은 민족이기는 한 것 같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해야 하나. 그런 흥은 바로 화(火)로 바뀌기가 쉬어 다혈질의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주변에서 보면 어떤 때는 그리 화를 낼 일도 아닌데 화를 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미안함을 표시해야할 때도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 때마다 ‘우리 민족은 화를 잘 내는 민족이란 말도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전에는 한(恨)이 많은 민족이란 말은 있었다. 그러나 요사이는 화가 많은 민족인 것 같다. 사전적 의미로 ‘화는 못 마땅하고 언짢은 것’ 이라 하고, 영어로 번역할 마땅한 말은 없지만 가장 가까운 의미가 ‘anger’ 인 것 같은데, 분노하고 화는 같은 건가? 분명히 한하고는 다른 것 같다. 한은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여 슬픔의 응어리가 있는 것이고, 분노에는 슬픔에 대한 내용은 없는 것으로 보아 화는 한과 분노의 중간 단계쯤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우리 민족이 힘이 없고 문제해결 능력이 많이 없을 때는 당연히 한이 많았을 것 같고, 그러나 아직은 그리 다 해결이 안되니 분노보다는 화를 내면서 지내는 지도 모르겠다. 공연히 필요이상으로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이나 요사이 심심찮게 발생하는 분노범죄들을 보면 결국 자신감 결여로 생겨난 것으로 이 사회에 화를 줄이려면 스스로 자신을 강화하는 전략이 필요할 것 같다.

삶 자체가 전쟁이다 보니 행복을 쟁취하고 살려면 싸움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전략을 세울 틈이 없이 상황이 종료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버나드 쇼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 처럼 인생의 대부분인 싸움도 구체성 없이 바라보다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도 못하고 끝나버리게 된다. 간혹 진짜 싸움할 만큼 흥분은 했는데 적절한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서서 ‘아~그때 왜 이 말을 생각하지 못했지’ 하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따라서 싸움을 잘 하려면 미리 상황 파악과 예측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언제나 이 부분은 허술하기만 하다. 이런 능력을 키우려면 나를 비롯하여 내 주변의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관찰하려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래야 나는 왜 화가 났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나를 화나게 만들었는지 미리 예측하여 사전 방어를 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상처를 받지 않고 행복을 쟁취하려면 나에게 상처를 주는 적군(대개는 가까운 가족이나 동료인 경우가 흔하다)일수록 미리 잘 살피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문제를 알기는 하지만 동의해 주기도 어렵고, 삶의 방식도 철학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손을 써 볼 여지가 없는 경우가 있지만, 대개의 경우 조그만 노력을 하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어떤 이는 남을 이해하는 것이 큰 난제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더 어려운 일은 상대방에게 나를 이해시키는 기술은 그리 쉽지는 않다. 이때 설득력 있는 언변과 매력있는 리더십은 큰 힘이 되겠으나 특히 나에게는 참 아쉬운 덕목이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도움이 되는 팁이 하나 있는데, 기본적인 신뢰가 바로 그것이다.

법정 스님의 인연처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위안을 주고 서로에게 행복을 주고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지금의 당신과 나의 인연이 그런 인연이기를…” 참으로 부러운 인연이다. 항상 위해주고 양보해주고 용기를 주는 마음은 저금처럼 쌓여 신뢰가 되어 뜻하지 않게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를 이해받게 만드는 비결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마다 꼴뚜기가 아니듯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나의 마음처럼 움직이는 것은 어림없는 일(아들 둘을 키우면서 또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사실 잘 터득되어 있긴 하지만)이다. 요즘은 되는 일보다는 안되는 일이 많아 기대감도 많이 떨어져 세상살이 다 그러하다고 살고 있지만 꼭 해야만 하고, 또 하면 될 것 같은 일이 안되면 분이 안 풀려 그래 너도 나중에 당해보라고 앙심(?)을 품는 것이 고작이다. 거기다 오히려 엉뚱하게 대개는 나를 위해주고 이해가 많은 착한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거나 하소연을 쏟아내니 그 역시 민폐를 끼치고 사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고리는 돌고 돌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의 부정적인 것을 줄이고, 긍정적인 기운을 불러내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좋은 덕목이 되는 것이다. 대개는 잘못을 했으면 처음부터 솔직하게 인정하면 된다. 말은 쉬운데 나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타인의 노력과 땀을 인정하는 마음은 어려운 수련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훌륭하신 분일수록 자신의 과오에 대해 엄격하고 타인의 성과를 크게 쳐주는 일이 쉬운 것을 보면 나의 약점을 잘 파악해 대처하고 타인의 장점을 크게 쳐주는 삶이 인생에서 행복을 얻는 주요 성공 전략인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객관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기초연구를 하면서 살아가는 일과는 매일 어려운 퍼즐을 풀 듯 나의 연구결과를 관찰하고 다른 이의 연구를 공부하고 분석하면서 지내는 것이다. 내 학생들은 나의 몸과 일체가 되어 그들의 젊음과 시간을 쾌쾌한 실험실에다 바치며 때론 큰 십자가를 지고 고행하는 삶처럼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객관성을 잃지 않고 판단력을 맑게 유지하는 훈련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삶에 행복을 주는 비결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연구자들이 매달리는 과제가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열쇠라는 자부심을 갖고 매진할 수 있도록 적어도 조용하게 어려운 퍼즐을 풀 수 있는 환경을 배려받고 싶은 욕심이 있을 뿐이다.

행복을 얻는 핵심 전략은 자신의 일에 대한 몰입이다. 다른 이에 눈에는 별 일 아닐 수 있는 것이지만 내 정성과 시간을 듬뿍 쏟아 부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고, 그 결과가 다른 이에게 만족과 행복까지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로 성공적인 삶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나 자신의 몰입도 중요하지만 내 주변의 함께하는 이들과 함께 공동으로 신바람 나게 같이 할 수 있다면 만족감이 높은 행복한 삶일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전 단계에서 꼭 필요한 전략으로 사람은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노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잘 맞추어져 있으면 만족감과 행복감을 얻게 되지만 노력과 보상의 간격이 크면 큰 실망과 좌절을 맛보게 된다. 노력에 대한 인정이 있다면 경제적이거나 성과적인 보상이 부족해도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제 우리는 다른 이들의 노력과 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니 어쩌면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땀에 대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된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로 자신이 살아온 세월에 대하여 잠시 경건하게 내가 지고 살아온 시간에 대한 노력을 치하하고 격려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노력과 땀에 대한 숭고함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서로에 대한 인정과 감사는 이 사회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가 있고 이런 행복감은 다시 전파되어 전염병이 퍼지듯 우리사회를 건강하고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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