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간의 오랜 공직 생활의 끝자락이었다. 입양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은퇴한 뒤인 만큼 아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준비하는 시점에 입양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줬다. 신언항(69) 전 보건복지부차관(이하 ‘S’ 전 차관)의 이야기다. ‘S’ 전 차관은 행정고시 16회로 30년간 보건복지부에서 공직 생활을 하다 지난 2003년 차관으로 퇴임했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으로 2003년 7월부터 2006년 6월까지 3년간 역임 후, 2013년 중앙입양원에 부임했다. 필자가 약 20여 년 전부터 복지부를 출입하면서 지켜봐 온 ‘S’ 전 차관은 인자하고 섬세하며 특히, 항상 다른 사람을 웃는 얼굴로 대하는 다정다감한 선비이다.

아는 것과 경험한 것의 차이는 의외로 크다. ‘키스를 글로 배웠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입양 문화도 마찬가지다. 입양을 ‘귀동냥으로 배운’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남의 자식을 키우는 게 쉽지 않아”, “나중에는 다 자기 부모 찾는 다더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나 입양을 현실로 ‘경험’한 사람들은 다르다. “이렇게 귀엽고 맑은 아이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냐”는 마음이 앞선다. ‘S’ 전 차관이 ‘입양’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전력을 다하게 된 건 동영 군을 만나면서부터다. ‘S’ 전 차관의 부인 김명희(65)씨는 2002년부터 노량진의 한 보육시설에 매주 봉사활동을 나갔고, 얼마 후 그도 김씨의 제안으로 보육시설을 찾기 시작했다. 2003년 복지부 퇴임 얼마 전이었다.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보육원을 방문해 직접 아이들을 만났고 또 경험했다. 그 중 유독 한 아이가 눈에 밟혔다. 생후 3개월 된 동영 군을 그때 처음 만났다.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아이였습니다. 우유를 잘 먹지 않아 보육교사가 애를 먹는 모습을 보고 더 관심이 가더군요.” 동영 군은 ‘S’ 전 차관 부부를 ‘엄마’ ‘아빠’라고 불렀다. 동영 군이 처음 한 말이었다. 어린이날이나 명절 때에 아이를 며칠씩 집에 데려와 놀다 가게 했다. 보육원에 돌아갈 때가 되면 말이 없어지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끝내 체념하듯 발길을 돌리는 네 살 아이를 지켜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S’ 전 차관은 “마치 군대에서 휴가 나왔다 복귀하는 모습 같았다”고 회고한다.

‘S’ 전 차관은 “동영이를 모임에 한 번 데리고 나갔는데 집사람이 ‘우리 아들’이라고 깜짝 소개를 했다”며 “나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상의도 없이 발표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운명으로 이어졌다. 이 일이 있고 얼마 뒤인 2005년 12월 31일, 마침내 S 전 차관과 부인 김명희(64)씨는 아이를 가족으로 맞아들였다. 두 아들 대영(35)씨와 수영(34)씨는 이미 장성한 뒤였다. 이렇게 아이를 입양한 후 ‘S’ 전 차관의 삶은 바뀌었다. 자연스레 국내 입양 부모들 단체인 한국입양홍보회 이사로 활동하게 됐다. 이어 우리나라가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 서명을 위해 중앙입양원을 설립하면서 초대 원장을 맡았다. 그의 부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이전부터 해외입양아들과의 커뮤니티를 구축, 지속적으로 우리나라와 연을 맺도록 노력했을 뿐 아니라 과거 복지부 재직 당시 국외입양인 지원사업을 주관했었다. “주미대사관 근무시절부터 현지입양아, 입양부모들과의 교류를 이어왔어요. 대사관저에서 ‘코리안페스티벌’을 처음으로 개최하기도 했죠. 대통령비서실 발령 후에는 입양된 이들과 영부인의 모임을 주선하기도 했고요. 보육원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정이 든 지금의 막내아들 입양 후에는 이전보다 그들을 잘 이해하게 됐죠.”

중앙입양원은 사라지는 보육원자료를 수집해 DB를 구축 등을 통해 24만명에 이르는 입양인의 뿌리 찾기, 입양 사후 관리, 입양 전문기관 관리를 하는 재단법인으로, 중앙입양원의 설립은 과거 홀트아동복지회로 대표되는 민간기관이 아닌, 국가가 입양을 주도하고 아이를 돌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우리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입양 후진국’, ‘아동 수출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지 못하고 있다. 1995년에 발효된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도 국제사회의 압박을 받아오다 2013년에야 서명했다. 보호가 필요한 아동이 발생하면 어려운 상황이라도 원래 가정에 맡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차선책으로 국내 다른 가정의 보호, 최후 수단으로 국제 입양을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하는데 20년이 걸렸다.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게 기초인 것처럼 입양이라는 분야에 본격적인 주춧돌을 놓는 자리가 현재 중앙입양원의 정확한 위치다. 무엇보다도 입양 중에서 가장 고난이도에 속한다는 ‘연장아’ 입양을 통해 그 자신이 입양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는 점은 그가 원장으로 있는 중앙입양원 뿐 아니라 우리나라 입양문화의 성장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중앙입양원 설립과 함께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기관을 이끌어가고 있는 ‘S’ 전 차관은 국내 입양 관련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는 입양 관련 지식과 이론에 밝은 것을 넘어서 입양과 관련 일을 사랑하고 그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S' 전 차관은 동영이가 어릴 때부터 3~4곳의 학원에 다녀야 하는 한국 사회의 교육시스템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아 시골에서 키운다. 동영이는 다른 또래들처럼 장난이 심하고 까분다. 가끔은 거짓말도 한다. ‘S' 전 차관이 동영이에 대해 바라는 꿈은 소박하다. 사회공동체에 잘 어우러져 살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셋째 아들이 이제 열네 살이라서 90세 이상까지는 살면서 동영이를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S 전 차관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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