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속담에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은 것이다’(‘Ende gut, alles gut’)라는 격언이 있다. 독일뿐만 아니라 우리도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그 격언을 실감하게 될 때가 있다. 마지막까지 좋아야 모든 것이 좋은 것인데, 참 훌륭하고 좋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 마지막에 사소한 잘못으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드는 경우를 필자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목도할 수 있었다. 필자는 보건복지부를 약 20년이 넘도록 장기 출입하면서 몇 몇의 장관이 퇴각할 때 희비가 교차하는 모습을 봐왔다. 어떤 장관은 인사권자에게 항명성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반면, 어떤 장관은 정부 정책의 모순을 비판하고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떠났다.

국민의 정부 시절 ‘L’ 전 장관은 취임 5개월 여 만에 전격 경질되자 “건강보험 약가 인하정책에 반발한 국내외 제약사들의 경질 압력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었다. 그는 이례적으로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떠나며’라는 성명서를 배포, “장관이 바뀌는 이유에 대해 어디에서도 분명한 설명을 듣지 못했고, 도와달라는 말밖에 없었다. 이는 최근 우리가 추진해온 건강보험재정 안정대책의 핵심적 내용이 보험약가제도의 개혁이었는데, 이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항변했다. ‘L’ 전 장관은 “국민의 공정한 고통분담을 위해 건강보험료를 인상하고 의료계 수가를 인하했으며, 마지막 차례는 국내외 제약사의 고통분담이었다. 이에 대해 국내외 제약산업은 심각하게 저항했고 다양한 통로를 통한 압력을 행사해왔다”며 “누가 장관을 맡는다 하더라도 이 과제의 수행 없이 국민건강과 행복을 지키는 보건복지정책을 펴갈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L’ 전 장관은 퇴임식 후 기자들과 만나 “제약회사 관계자들이 전화를 해서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줄 아느냐’는 내용의 협박도 했다”고 폭로했다.

참여정부 때 실세로 불렸던 ‘Y’ 전 장관은 2007년 4월 국회 본회의에서 ‘더 내고 덜 받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부결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청와대에 사의를 표했다. 국회 본회의에서 이른바 ‘더 내고 덜 받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부결된 반면, 기초노령연금법 제정안은 통과됐다. 이 두 법안은 일종의 ‘패키지’ 법안이라고 Y 전 장관은 설명해왔다. 즉, 국민연금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빈곤 노인에게 일종의 ‘용돈’인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하고, 대신 국민연금법 개정을 통해 적자 구조를 어느 정도 개선하자는 취지다. 당시 그 구조대로 가면 2047년이면 연금기금이 고갈될 것으로 추산됐는데 가입자들이 돈은 더 내고 연금은 덜 받도록 해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구조로 바꾸는 게 개정안의 내용이었다. 기초노령연금은 어쨌든 돈을 더 주겠다는 것이니 다들 반기는 것, 국민연금 개정은 반기지 않을 것이란 점은 분명했다. 그런데 막대한 예산을 써야 하는 기초노령연금법만 통과되고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부결돼 재정 상황이 더 악화되게 된 것이다. ‘Y’ 전 장관은 부결에 책임을 지고 청와대에 사의를 밝혔다. 이후 국민연금법은 ‘더 내고 덜 받는’ 식은 아니라 ‘그대로 내고 덜 받는’ 식으로 조금 조정돼 같은 해 7월 개정됐다. 대선을 앞둔 해였고 그 다음해는 총선도 있었으니 정치권에서 국민 눈치를 엄청 보던 때이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J’ 전 장관은 2013년 9월 전격 사의를 표명했다. ‘노인 전체에게 20만 원씩 주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과는 달리, 65세 이상 노인 중에서도 소득 하위 70%에게 최대 20만 원을 국민연금과 연계해 차등 지급하는’ 내용의 기초연금 실행방안이 문제로 작용했다. ‘J’ 전 장관은 박 대통령에게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하지 않고 노인 70%를 대상으로 현재의 기초노령연금 금액을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보고했다. 하지만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실은 재정 여건을 감안해 노인 70%까지 지급하되 방식은 공약대로 기존의 기초노령연금을 기초연금화하고 국민연금과 통합 운영해야 한다는 안을 고수했다. 가뜩이나 대선 복지공약 수정으로 청와대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상황에서 사퇴 카드를 꺼내면서 박 대통령의 리더십에 큰 손상만 줬다는 비판이 쇄도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J’ 장관은 평상시에도 장관을 오래할 생각이 없다고 주변에 말을 자주 했다”면서 “국정감사를 앞두고 장관을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도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J’ 전 장관은 사퇴를 생각하긴 했다는데 복지부장관으로서 무력감을 느꼈기에 그랬다고 했다. 다만 ‘대선 공약 후퇴 책임설’이 문제가 되니까 면피성 발언을 했다는 해석도 그럴 듯해 보인다.

장관 사퇴에도 명분이 있고 품위(품격)가 있어야 한다. 일국의 장관이라는 자리가 개인의 출세가 아니라 해당 분야의 정책 전반을 책임지는 자리로, 후보를 선정해 고르고 청문회까지 거쳐 장관으로 임명할 때 그럴 만한 이유와 시사하는 의미가 있듯, 물러날 때도 그러해야 한다. ‘Y’ 전 장관에 대해 평가는 엇갈리겠으나 6년 전 겪었던 사퇴는 그러했다고 느꼈다. 그 뒤로 ‘Y’ 전 장관은 여러 곡절 끝에 정치 일선에서도 물러났지만 나는 적어도 그를,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고 있던 정치인으로 기억한다. ‘J’ 전 장관도 국민에게 의미가 있는, 품격 있는 사퇴였다고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때가 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열매를 거둘 때가 있다. 외칠 때가 있고 침묵할 때가 있다. 그 시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김형기 시인의 ‘낙화(落花)’라는 시가 귓가를 맴 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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