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전 보건복지부장관(이하 ‘S 전 장관’)은 문민정부 시절 1996년 11월 13일 제 33대 복지부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한약조제권 분쟁(이하 ‘한약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해 보건복지부 공무원들로부터 ‘역대 가장 일 잘한 장관’이라는 평을 얻었으며, 대한한의사협회와 대한약사회 양쪽으로부터 모두 감사패를 받을 정도로 탁월한 화합과 조정능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한약분쟁’은 약 20여 년 전의 사건이다 보니 이를 위해 자료를 찾고 최대한 정밀하게 재구성하였다. ‘한약분쟁’은 약사들의 한약조제 허용 여부로 인해 촉발된 한의학계와 약학계 그리고 이를 중재하던 정부 사이의 갈등으로써 1993년부터 시작돼 1997년이 되어서야 일단락된 사건이다.

한약분쟁의 시발점은 1993년 1월 30일 보건사회부가 입법예고한 약사법시행규칙 제11조1항7조(재래식 한약장 조문)를 삭제한다는 개정 법률안이었다. 당시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안필준)은 ‘약국에는 재래식 한약장 이외의 약장을 두어 깨끗이 관리해야 한다’는 약사법 제11조1항7호를 삭제해 사실상 약사의 한약조제를 허용하려 했다. 한의계와 약계는 약사의 한약 임의조제행위 문제를 두고 지속적으로 갈등해 왔지만 1993년 3월 15일 보사부의 일방적인 약사법 시행규칙 공포로 한의사들은 분노했다. 안필준 전 보사부장관은 ’약국에서는 재래식 한약장 이외의 약장을 둬 이를 청결히 관리해야 한다’는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이 담긴 서류에 도장을 찍고 퇴임했는데, 이로 인해 약국에서 한약조제가 가능한 것으로 유권해석이 가능하게 됐다. 한의학계에서는 이에 강력 반발하게 된다.

실제로 대한민국 약사법은 한의사제도가 없는 일본의 법률을 거의 그대로 베껴 와서 만들었기 때문에 한약에 대한 조항이 거의 없어서 약사의 한약조제에 대해서는 법적 해석에 따라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한 애매한 약사법이 이 조항 하나로 겨우 약사와 한의사간의 암묵적 동의를 이끌어왔던 것이다. 즉, 약사는 한약을 지어도 당시 약사법상 법적인 제재는 힘들지만 한약장을 비치하고 공개적으로 짓는 것은 약사법에 위반이 된다는 아슬아슬한 규정이었다. 한의사협회와 한의대생들은 일방적인 지지여론을 등에 업고 나름대로 선전했고 이로 인해 ‘한약학과’ 신설이라는 절충안이 채택됐다. 그러나 이것은 더 큰 불행의 시초에 불과했다. 기존 약사들은 초등학생도 풀 수 있는 정도의 시험만으로 기득권을 인정받아 한약조제권을 얻어냈고, 한약학과 학생들은 약사와 한의사의 틈 사이에서 한의사도, 약사도 될 수 없는 더욱 비참한 희생양이 돼야 했다.

한약분쟁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1995년 한약사 및 약사의 한약임의조제 범위를 정하는 한약조제지침서 범위를 놓고 한의계와 약계가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제2차 한약분쟁이 발발했다. 본격적인 제2차 한약분쟁은 1996년 제2회 한약조제약사시험(이하 ‘한조시’)이 공고되면서부터다. 당초 한의계는 ‘한조시’ 응시자격을 가진 약사가 2000명 안팎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2만5000여명의 약사들이 한약조제 경력을 주장하며 응시하자 한의계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조시는 강행됐고, 그 결과, 응시자의 97%가 합격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한의계는 1996년 5월 3일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한약조제약사 대량배출 음모 분쇄를 위한 전국한의사 비상총회를 개최, 항의집회와 300여 명의 한의사들이 삭발 투쟁을 감행했다. 이후 한의사들은 집회장소를 서울 시내의 조계사로 옮겨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하는 등 항의 집회는 지속됐다. 수천 한의사의 삭발과 목숨을 각오한 무기한 단식농성에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한약분쟁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특히,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불법 한약조제약사시험 고발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이 분쟁은 경실련의 중재로, 약사의 한약조제를 원칙적으로 금지시키는 새로운 약사법이 통과되는 것으로 잠시 잠잠해졌다. 약사와 한의사들은 다음해인 94년 ‘한방의약분업을 3년 안에 실시한다’는 경실련의 중재안에 합의했고 정부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한약사 제도를 신설키로 했다. 한방의약분업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처방전을 발행할 한의사와 이를 받아 한약을 조제할 한약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한약분쟁은 정치적으로 타결됐다. 우선 한약학과는 한의대가 아닌 약대에 설치하되 한의대가 있는 종합대학에 설치가 됐다. 한의사들의 군의관, 공보의에 입대할 수 있게 됐고, 행정부 내 독립적인 전담부서(한방정책관실)가 설치됐다. 한의학연구원 설치, 국내 한의과대학 설치 검토를 약속했다. 원래 서울대 내 한의대 설치를 요구했지만 수포로 되고 이후 부산대에 한의학 전문대학원이 설치됐다. 정부는 한의사들에게 당근을 주는 식으로 분쟁을 종결시켰다. 이 사항들은 한약분쟁과 상관없이 한의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것들이었다. 이와 함께 한의약발전기금 마련과 한의약육성법 제정을 추진하는 계기가 됐으며, 국립의료원 내 한방진료부를 설치해 한의학의 제도권 편입을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한약분쟁을 원만하게 합의한 과정에는 ‘S’ 전 장관의 정책조정과 행정능력이 주효했다는 평가이다. 그는 엄청난 사회적 문제였고 3년이나 끌었던 한약분쟁을 몸으로 뛰면서 소리 소문 없이 진정시키는 놀라운 조정능력을 보여줬다. ‘S’ 전 장관은 1996년 당시 신한국당 정책조정위원장을 맡아 보여준 정책조정과 행정능력을 인정받아 복지부장관에 임명됐다. 장관 재임 중 장애인, 노인, 여성, 서민의 복지 확충을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에 힘썼다. 복지부 공무원들은 가장 함께 일하고 싶은 장관으로 뽑히는 영광도 안았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S’ 전 장관이 출입기자 회견장에서 “보건복지부장관하며 3년 묵은 한약분쟁을 몸으로 뛰며 해결한 통합의 능력이 국민이 요구하는 리더십”이라고 자신해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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