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서둘러라

라틴어의‘페스티나 렌테’와 ‘여유작작’ 은 일맥상통 한다
천천히 서두르며(?) 착실하게 걷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다

▲ 권이혁 전 보사부장관

라틴(Latin)어 문구에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라는 것이 있다. 직역을 하면 “천천히 서둘러라” 라는 뜻인데, 많은 학자들이 인용하기도 한다. “천천히 서둘러라” 는 뜻은 알듯 모를 듯 하면서 어딘가 매력이 있는 것 같아서 필자도 가끔 인용할 때가 있다.

“덮어 놓고 서두른다” 는 것이 금물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잘 알고 있다.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물론 서둘러야 하지만, 무작정 서둔다면 생각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제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해도 한 발짝 한 발작씩 착실하게 밀고 나가는데서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경험하고 있는 바이다.

천천히 서두르면 가는 길이 멀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서두르지 않고 착실하게 걷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다.

필자는 ‘페스티나 렌테와 여유작작(餘裕綽綽)’ 과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서두르지 않고 착실하게 일하는 마음의 상태” 를 ‘여유작작’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필자는 ‘여유작작’ 이라는 문구를 몹시 좋아한다. 내 인생 슬로건의 대표라고 언제나 소개하고 있다. 덮어 놓고 급하게 구는 것과는 정반대의 마음의 가짐이다. 매일같이 언론에서 보도하는 건물붕괴사고, 교통사고 등은 ‘여유작작’ 이나 ‘페스티나 렌테’ 가 무시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급하게 굴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덮어 놓고 급하게 굴면 먼 길을 돌게 된다. 가깝고 가장 효율적인 길이 ‘여유작작’ 이나 ‘페스티나 렌테’ 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격언에 ‘이소가바 마와레’(急がば回れ)라는 것이 있다.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을 정도로 흔하게 사용되는 말이다. “급하게 서두르면 돌아가게 된다” 는 뜻이다. 가까운 길을 간다는 것이 먼 길을 가게 된다고 꼬집는 말이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여유작작’ ‘페스티나 렌테’ ‘이소가바 마와레’ 등을 심심치 않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가 한때 국제적으로 웃음거리도 된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빨리 빨리’ 덕분에 우리나라의 발전 속도가 빨라진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인사도 있다.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법인데 ‘여유작작’ 한 마음가짐으로 ‘빨리빨리’ 를 실천한다면 효율적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면종복배

면종복배 하는 사람을 처세술이라고도 하지만
필자는 이중인격의 이들에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

면종복배(面從腹背)라는 말이 있다.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배반하다’ 는 뜻이다. 면종복배를 하는 사람은 이중인격의 소유자인 까닭에 필자는 이러한 분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지만, 면종복배를 처세술의 하나로 생각하면 반드시 악의(惡意)로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인사들도 있다. 면종복배가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방법의 하나라고 하는 주장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왜 그런지 필자는 이에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선조 25년(1592년)부터 31년(1598년)까지 왜군(倭軍)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일어난 전쟁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사실은 주지되어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단계로 규슈(九州) 징벌을 끝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1595년경부터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요시게(宗義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을 알고 조선에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했다.

쓰시마도주는 가신(家臣)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했다. 첫 번째 일본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조선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종전과는 달리 일본측의 거동이 오만했던 까닭에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강경론이 부상하고 조선통신사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도요토미의 첫 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15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史),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로 파견했다. 이들은 이듬해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했다. 답서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이 있었고, 침략의도가 분명히 나타나 있었다. 더욱이 정사와 부사의 보고 내용은 정반대였으며,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1592년 4월 14일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약 1만8000병력을 끌고 부산성(釜山城)과 동래성(東來城)을 점령했고, 4월 18일에는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제2군 2만2000명을 이끌고 침공한데 이어,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제3군 1000여 명을 끌고 다대포(多大浦)를 거처 김해(金海)에 상륙했다. 왜군들은 북진하면서 한양이 함락되고, 선조는 평양으로 도피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이순신(李舜臣)장군의 덕분으로 임진왜란이 마무리됐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이 글은 임진왜란을 소개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의 ‘면종복배’ 를 살피는 데에 목적이 있다. 고니시는 기독신자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에게 기교(棄敎)를 명했다. 고니시는 도요토미의 명령에 복종해 종교도 버렸고, 전쟁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임진왜란이 무모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전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왕조와 화평공작(和平工作)을 계속했다. 이러한 사실때문에 고니시는 ‘면종배복’ 의 대표적 인사로 가끔 예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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