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균
서울 성북·이정균내과의원장

영월(寧越)은 지명처럼 ‘편안히 넘어가는’ 장이 아니었다. 옴팡 들어간 분지형태인 이 땅에 닿으려면 첩첩이 가로막는 산들을 뚫고 오지로 가는 길은 멀었다.

영월엔 두 개의 큰 강이 있다. 하나는 영월 동쪽을 적시고 흐르는 동강이요, 다른 하나는 서쪽 산기슭 사이를 휘도는 서강이다. 동강은 ‘수캉’ 이요, 서강은 ‘암캉’ 이다. 수캉과 암캉이 영월에서 하나로 만나서 이 땅의 큰 물줄기인 남한강이 된다. 하늘에서 영월을 내려다보면 뱀이 똬리를 틀 듯 강이 퍼져있다.

1990년대 중반에 영월댐 문제가 불거지면서 동강은 관심의 대상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동강과 서강은 동화나라의 물줄기였으나 이젠 서강이 맑은 물, 기암괴석의 매력에 환호하면서 생태계의 보고로 관심의 고을이 되었다.

강물 속에는 어름치, 쉬리, 쏘가리들이 헤엄치고, 원앙, 비오리, 수달이 살며 강기슭 산지엔 야생화 천국이다. 태기산 남쪽 사면을 흘러내린 물줄기는 둔내·안흥을 거쳐 영월 땅에 이르면 ‘서만이 강’ 이 된다.

▲ 섶다리 삿갓들
뱀이 똬리 틀듯 회오리치면서 360도를 휘감아 도는 물줄기는 갇힌 땅은 섬 아닌 섬이 되면서, 이런 풍경이 몇 개 겹치면 강 안에 섬이 솟고 섬 안에 강이 흐르게 되니, 강 이름이‘섬 안의 강’ 이란 뜻의 서만이강이 되었다. 둘레 강마을은 운학(雲鶴), 두산(斗山), 도원(桃園), 무릉(武陵), 법흥(法興)이 머리를 들어 꽃처럼 피어났다.

법흥사 들머리의 무릉은 이웃한 도원과 함께 서만이강의 ‘무릉도원’ 에 끼었다. 법흥천이 서만이강에 흘러드는 합수머리의 기암괴석 바위들은 선녀 놀이터 요선암(邀仙岩)이다. 요선암을 굽어보는 물가의 암벽 꼭대기에는 요선정(邀仙亭)이 신선들을 맞이하기 위해 살포시 자리하고 비바람에 굽어 자란 노송들 너머로 서만이강의 풍광을 감상하는 절묘한 강 풍경이 일품이다.

법흥사에서 서만이강으로 붙으려면 요선정 삼거리까지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물줄기 따라 흘러가다 강줄기를 한 굽이 돌아서면 주천(酒泉)이다. ‘술이 솟는 샘’ 술꾼들은 환호할지 모르겠으나 사람 차별하는 샘이다. 옛 기록에는 이 샘에다 양반이 잔을 들이대면 약주가, 천민이 들이대면 탁주가 솟아났다는 게다. 그러자 어느 날 한 천민이 커다란 갓을 쓰고 잔을 들이댔는데도 탁주가 나오자 샘을 부숴버렸다. 그 이후 주천에서는 술 대신 맑은 물만 흘러나왔는데 그 물이 주천강(酒泉江)이 되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입맛 다시며 아쉬워하지 않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이 전설을 술꾼들의 신분을 차별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술 익는 마을’ 주천에 ‘섶다리’ 가 있다.

섶다리는 잡목의 잔가지를 엮어서 만든 나무다리다. Y자형의 소나무를 일곱자 간격으로 양쪽에 박고 싸릿가지로 엮은 바자를 올려놓는다. 바닥에 솔가지를 깔고 흙을 다져서 바닥을 만들었다.

섶다리엔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도끼와 끌로만 기둥과 들보를 만들어 맞추었다. 가을추수가 끝난 늦가을에 다리를 놓았다. 겨울이 지나 이듬해 장마가 들기 전까지 사용했다. 섶다리 놓는 작업은 마을의 큰 행사였다. 집집마다 기둥으로 쓸 나무를 할당하여 나무를 장만하게 하였고 섶다리 놓기 위해 노하우를 알고 있는 노인들과 장정들이 작업을 했다. 장정 스물 댓 명이 꼬박 이틀정도 작업해야 다리가 완성되었다 한다. 다리가 완성되면 마을사람들은 동네잔치를 벌였다.

섶다리는 출렁다리다. 출렁거린다. 예전엔 장에 다녀오던 마을 어른들이 술 한 잔 걸치고 건너가다 떨어져 물에 빠지기도 했다. 비가 많이 내려 강물이 불어나면, 건너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소박한 섶다리는 나무와 흙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답고 거창한 다리도 따라올 수 없는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게 섶다리다.

지금은 주천교(酒泉橋) 하류에 놓인 섶다리 건너 조약돌을 밟고, 옛날을 그리면서 잠시 걷다보면 섶다리를 겹으로 세워놓은 쌍섶다리를 볼 수 있었다. 여느 곳에서 보기 어려운 쌍섶다리가 놓인 내력은 3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월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단종이 복권되자 조정에서는 원주로 부임하는 강원 관찰사에게 단종이 묻힌 장릉에 참배토록 하였다. 유뱃길의 단종도 지나간 원주~신림~주천~영월에 이르는 여정은 원주에서 영월로 드는 큰 길이었다. 그리고 주천에서 강을 건너야 했다.

주천강을 사이에 둔 주천리와 신일리 백성들은 관찰사 일행이 강을 건너기 쉽게하기 위해 섶다리를 놓았다. 그런데 그 당시에 관찰사가 타고 다니던 가마는 사인교(四人轎)여서 외나무다리로는 건널 수 없었으므로 쌍다리를 놓아야 했다.

쌍다리를 건너 장릉 참배를 마친 관찰사 일행은 며칠 뒤 돌아가는 길에 주천에 머물면서 쌍섶다리를 놓느라 수고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쌍섶다리 건설은 단종을 기리기 위한 의식이면서 마을 공동의 축제로 승화한 셈이 되었다. 강원 영월 주천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쌍섶다리 노래’ 에도 그 사연이 아로새겨져 있다.

‘에헤라 쌍다리요 / 에헤라 쌍다리요 // .... // 장릉 알현 감사행차 / 무사하게 건너도록 /
튼튼하게 정성들여 / 쌍다리를 놓아주세 // ... // 임에 다리 두다리요 / 내 다리도 두다리니 /
이 아니 쌍다린가 //....’

섶다리는 강원도 강촌에서 겨울철에 놓는 임시다리다. 추수가 끝난 늦가을에 만들었다가 이듬해 장마가 지면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자연친화적 나무다리다.

10여 년 전까지는 강원도 영월과 정선 지방에서 쉽게 섶다리를 볼 수 있었다. 이 지역에 강이 많기 때문이다.

영월 지역의 섶다리는 줄배라 불리는 나룻배와 더불어 강을 건널 수 있는 소중한 수단이었다. 동강유역에도 예전엔 섶다리와 줄배가 많았으나 최근 몇 년 사이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아쉽게도 나루마다 거의 콘크리트 다리가 세워졌다. 게다가 래프팅 배들이 수시로 떠내려가니 관광용 섶다리 세우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비해 서강 물줄기에는 섶다리가 제법 복원되어 있다. 서강에 합류하는 물줄기인 평창강의 주천면 판운리는 섶다리 잔치를 벌여놓고 관광객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주천강과 평창강의 합류지점 한반도 지형으로 유명해진 옹정리 선암마을 섶다리에 넌출넌출 흔들리는 섶다리를 건널 수 있으니 좋다.

▲ 주천면 판운리 섶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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