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봉윤
- 대한약사회 홍보위원장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유행병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21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플루엔자였다. 14세기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25%를 죽게 만들었다.

유행병으로 찾아오는 전염병들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감염된 환자 한 사람으로부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비교적 신속하게 전파되어 단기간에 많은 인구가 전염병에 감염된다. 둘째, 감염되더라도 단기간에 죽거나 완치되는 급성질환이다. 셋째, 대체로 인간에게만 발생한다.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음 발견된 메르스코로나바이러스(MERS-CoV)의 진화적 전략은 감염자로 하여금 기침이나 재채기를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새로운 숙주들을 향해 분수처럼 뿜어 나간다(비말). 이에 대한 인간의 일반적인 대응 반응은 열을 내는 것이다.

감염 경로나 질병의 유행 과정을 몰랐던 옛날에는 전염병 자체가 극심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는 현대에서 초기 대응만 적절하게 취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감염된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고, 전파 경로를 차단시키기 위해 감염자를 격리 후 치료하면 된다. 전염병 발생 시 국민들의 패닉 현상은 실제 위험보다 더 과장되게 인지하는데서 나타난다.

◇전염병 ‘신속한 대응’ 관건=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매뉴얼에 따르면 가장 먼저 강조되는 원칙은 바로 ‘신속(Be first)’이다. 빠른 정보 전달이 모든 위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하다. 가장 먼저 제공되는 정보를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기 때문이라며 신속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CDC의 이 같은 커뮤니케이션 원칙은 에볼라 발병 당시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

메르스에 대한 대응 매뉴얼은 한국에서도 이미 2년 전에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항상 매뉴얼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번 메르스에 대한 정부나 삼성서울병원의 초기 대응이 잘못됨에 따라 사태가 너무 크게 악화되었다.

초기 대응을 잘못한 것으로도 부족해 2015년 6월 18일 보건복지부는 ‘의료법 제59조제1항(복지부장관의 지도와 명령)’에 따라 한시적으로 ‘의료법 제33조 제1항(대면진찰)’ 적용 예외를 적용하여 삼성서울병원의 재진환자에 대한 원격진료를 허용했다. 삼성서울병원 건의를 수용해, 담당의사가 외래환자를 전화로 진찰한 후 환자가 지정하는 약국으로 처방전 발송(팩스 또는 이메일)을 허용하기로 했다. 메르스 사태로 한시적인 대면진찰 적용이 어려워진데 따른 예외조치라지만, 자칫 원격진료 허용의 단초가 될 수 있다.

현 정부와 삼성 등 재벌의 원격진료 도입에 대한 갈망은 각별하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는 6월 8일 당최고위원회에서 “원격진료 의료시스템의 경우 우리당 보건복지위원들이 오랫동안 주장했고, 정부도 주장했는데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며 원격진료 도입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냈다.

◇‘불감청고소원’ 대상 아냐= 메르스 초기 대응에 실패한 정부와 삼성서울병원은 만시지탄이지만 지금에라도 메르스 종식에 최선을 다해야한다. 메르스는 원격진료 도입의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의 대상이 아니다.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 놓고 국가 위기를 이용해 특정 재벌병원에 특혜를 주고 이를 기회로 원격진료를 은근슬쩍 도입하려 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시행하고 나면 그 다음은 훨씬 쉽다. 한시적 방침이라 하더라도 메르스가 종료된 후 정부는 국민 편리와 비용 절감을 홍보하며 삼성서울병원의 원격진료를 정면 교사로 삼으려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격진료는 정보통신기기를 활용해야 한다. 삼성서울병원 예외적 적용 진료는 대면진료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전화 통화만 해당된다.

화상통화, 사진촬영 등을 활용해 추가 진단을 하는 원격의료를 지향해서 만든 건 아니다"라는 보건복지부 관계자의 말은 교언영색일 뿐만 아니라 재진 환자에 대한 대응책이 잘못되었다.

환자의 편의를 위해서는 삼성서울병원의 처방내역을 협력병원 의료인에게 공개해 처방하도록 하면 될 일이다. 현행법대로 의사와 의사간 원격의료를 하면 해결될 일을 굳이 특혜를 주어가며 분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이 급등하자, 다음 날인 19일 복지부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 권덕철 총괄반장은 “삼성서울병원과 협력·협진관계인 의료기관(약 2650개)에서 진료 받고, 의약품을 처방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강력한 비판여론에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선 모양새에 영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사정이야 어떻든지, 메르스 사태는 종식될 것이고, 치료약물도 머지않은(?) 장래에 개발될 것이다.

◇홀대한 ‘보건’ 중요성 커져= 각설하고, 이번 일을 계기로 공공의료 확충의 필요성과 복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아 온 보건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사보험이 발달한 미국의 경우도 2012년도 공공의료에 투자하는 비율이 GDP 대비 19.1%인데 반해 한국은 9.3%로 OECD 국가 중 멕시코와 더불어 최하위이다. 이번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공공의료를 대폭 확충하여야 한다. 2015년 복지부 예산 53조원 중 단지 19%인 10조원이 보건 예산이고, 복지예산은 81%인 43조원이나 된다. 불균형이 너무 심하다.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여 은근슬쩍 원격진료 도입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꼼수를 쓸 것이 아니라, 세월호 사건 등 거듭 반복되는 국가의 위기 대응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앞으로 다가 올 더 커다란 국가적 위기를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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