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 총장의 충고

▲ 권이혁 전 보사부장관
1945년 8월 18일로 생각된다. 오후 2시쯤에 협동당 사건에 연류 되었던 급우들이 의과대학 현관 앞 자그마한 잔디밭에 누워서 담배를 피우며 한담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구두로 내 구두를 툭 쳤다“. 독립투사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자가 누구인가”하는 말에 일어서서 보니 야마가(山家信次) 일본인 총장이 아닌가. 우리들 모두 일어섰다. 야마가 총장은 단신이어서 우리들은 그를 내려다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야마가 총장이 입을 열었다“. 지나가다가 자네들을 보니 한심스럽다고 생각되어 한마디 하겠네. 나는 패전 국민이어서 곧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앞으로의 일은 모르겠네, 먹고살 수 있는지도 알 수가 없네. 그런데 지금 자네들 앞으로 지나가려는데 자네들이 하고 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마디 하네. 도대체 이 땅에 대학생이 몇 명이나 있나. 몇 명 안 되는 학생들이 이 모양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자네들의 미래가 걱정되네, 자네들은 반도 출신이고, 나는 일본인이니 국적이 다르지만 사제지간에 국경은 없는 법일세. 스승은 제자들이 잘 되기를 바랄뿐이지. 자네들은 하루속히 훌륭한 독립 국가를 만들어야 하네.

그런데 자네들이 하고 있는 짓을 보니 훌륭한 독립 국가를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많은 것 같네. 그렇지 못하면 자네들은 다시 정복당하네. 패전국 일본이 다시 자네들을 지배하게 되지는 않게 되겠지만, 자네들을 노리고 있는 나라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네. 그냥 지나가려고 하다가 자네들이 하고 있는 꼴을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한 마디 하는 것이니 이해해주기 바라네.”그리고 떠나는 야마가 총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모스코바 삼상회의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 3개국의 외상(外相)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를 ‘모스크바 삼상회의’라고 한다.

미국대표 번즈(James f. Byrnes) 국무장관과 소련대표 모로토프(Vyacheslav Morotov) 외무장관 그리고 영국대표 베빈(Ernest Bevian) 외무장관, 이들 3개국 외무장관이 모여 모두 7개 의제에 대해 토의했다. 모스크바의 정서의 한국관계 조항은 3개의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코리아를 독립 국가로 재건하고 또한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을 창출하기 위하여, 그리고 장기간의 일본지배로 인한 참담한 결과를 가능한 속히 제거하기 위하여, 코리아의 산업과 운수 및 농업 그리고 코리아인의 민족 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코리아 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코리아 임시정부의 구성을 돕기 위하여, 그리고 적절한 방책을 미리 만들기 위하여, 남부코리아의 미군사령부와 북부코리아의 소련군 사령부 대표로 구성된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셋째, 코리아 민주 임시정부와 민주단체들의 참여 아래, 코리아인의 정치·경제·사회적 진보와 민주적인 차지정부의 발전 및 코리아인의 민주적인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협력원조(신탁 통치)할 수 있는 방책을 작성하는 것이 공동위원회의 임무다.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셋째 항인데 여기서는 ‘탁치’ 를 ‘독립달성의 수단’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공동위원회의 주된 임무는‘신탁통치방책의 작성’이며 임시정부 구성을 돕는 것도 부차적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코리아인을 단지 행정(administrator)이나 고문(consultant)으로 임용할 수 있다는 미국안과, 코리아인 대중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소련측 안에는 시사되는 차이가 상당이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의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미·소간 타협의 산물이며, 어느 누구의 독단에 의하여 결정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는 한국문제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고 하기보다는 미·소가 안고 있는 주변국들과의 문제가 초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1945년 12월 16일 미국은 유엔 주도 하에 4개국(미·영·소·중) 5년 내(5년 연장가능) 신탁통치를 한다는 안을 제출하였지만 소련은 별다른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고 일본 문제에 주의를 돌렸다고 한다.

소련은 중국문제에서도 미국의 주장을 인정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미·소의 협조는 최고조에 달한 것으로 보였으며, 냉전은 결코 시작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미·소 양국간의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고, 결론적으로 한국에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기간의 신탁 통치에 합의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반탁세력과 찬탁세력이 등장하고 치열한 대립 상황이 지속된 데에 관하여는 더 설명할 나위가 없다. 어느 날인지 확실한 날짜가 떠오르지 않지만 동대문 운동장에서 반탁 군중대회가 열린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나도 참석했다. 상당히 많은 군중들이 모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생겼다. ‘반탁’ 이 순식간에 ‘찬탁’ 으로 변한 것이다 주최자가 어느 단체인지 생각나지 않지만 ‘찬탁’ 으로 바꾸라는 졸지의 지시에 따라 그렇게 된 것 같다. 많은 분들이 퇴장했다. 나도 그러했다. 이 에피소드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미소공동회의가 진행되기는 했다. 1947년 9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회담이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UN에서 해결하려는 정책전환을 하게 되었다. 1948년 2월 한국의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자고 하는 미국의 제안이 UN에서 가결됨에 따라, 같은 해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던 장면이 지금도 눈앞에 어렴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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