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는 좌·우익 대립이 심각한 시절이었으며, 좌익진영은 기회만 생기면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려고 했다. 그들은 국대안 반대를 호재로 삼고 국대안 반대운동을 좌익운동으로 몰아갔다.

▲ 권이혁 전 보사부장관
1946년 6월 19일 미군정당국은 경성대학(京城大學), 구 경성의전·치전(齒專)·경성법전(法專), 경성고공(高工), 경성고상(高商), 수원고등농림(水原高等農林), 경성약전(藥專) 등을 통합하는 국립대학안을 발표해, 일부 학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8월 23일 군정령(軍政令)으로 국립서울대학교 신설을 강행하였다. 이에 일부 교수와 학생의 주도하에 통합 대상 학교의 학생회는 9월 5일 반대투쟁을 결의하고, 산발적으로 반대데모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반대투쟁의 이유는 학교 통합으로 고등교육기관이 축소되고 각 학교의 고유성이 없어지며, 총장과 행정담당 인사의 미국인 임명으로 운영 자치권이 박탈된다는 것 등이었다.

국립서울대학교로의 통합을 거부하는 구체적인 첫 행동은 학생들의 등록 거부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예정된 등록기일인 1946년 9월 12일과 13일이다 지나도록 등록률은 등록예정자의 10%에 불과하였다. 등록기간을 연장하여 9월 18일 개학을 하였으나 준비부족으로 개강을 곧 할 수는 없었다.

국대안 반대운동의 여파로 정상적인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되자 미국인 문교부장은 1946년 12월 18일 문리대, 법대, 상대의 3대학 휴교처분을 내리고, 이어 1947년 2월 3일까지 등교하지 않으면 폐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독단적인 휴교처분은 국대안 반대자들에게 굴욕적인 일로 받아들여져, 오히려 반대운동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중등학교까지 동조 휴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는 좌·우익 대립이 심각한 시절이었으며, 좌익진영은 기회만 생기면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려고 했다. 그들은 국대안 반대를 호재(好材)로 삼고국대안 반대운동을 좌익운동으로 몰아갔다. 의대교수 5명의 해임사건은 그 대표적 예였다. 명주완(明柱完)·나세진(羅世振)·최재위(崔在緯)·최의영(崔義楹)·허규(許逵) 등 5명의 교수를 좌익교수로 몰아 파면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들 5명의 교수가 사상적으로 불온하고, 대학행정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해임한다고 당국이 발표했는데,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국대안 반대운동의 산물인 것만은 틀림없다. 얼마 후에 해임이 철회됐지만‘5교수사건’은 현재까지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최 교수는 다소 회색적이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 외 4명의 교수는 대표적인 우익 교수들이었다.

국대안 반대운동이 시작됐을 무렵 필자는 박찬무(朴贊武) 형과 함께 의과대학 투쟁위원회를 만들어 나름대로 반대운동을 했다.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11월 초부터는 서울의 다른 대학에서도 등록거부 등 동정동맹휴학(同情同盟休學)이 시작되었으며, 12월 초에는 서울대학교 9개 단과대학에서 일제히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미군정 당국은 상대·공대·문리대에 3개월간 휴교조치를 취하였다. 1947년 2월 신학기에 반대운동은 절정에 이르렀고, 지방대학에서도 동정동맹휴학이 일어났다.

한편 학교 전체가 마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일부 학생들은 서울대학교의 건전한 육성을 이유로 국립대학안 지지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반대운동과 지지운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1947년 5월 12일 동맹휴학생 4956명(총수의 절반)이 제적되고, 교수 380여 명(총수의 3분의 2)이 해임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박찬무 형과 필자는 우리들의 동기들을 구해야 한다는 데에 뜻을 모았다. 우리 두 사람은 인장포를 찾아가서 동기생 53명의 도장을 만들었다. 그래 가지고 본인들과는 상의도 안하고 복학 지원서에 날인하고 대학당국에 제출했다. 이리하여 우리 동기생들은 한 명도 희생자가 없었다. 이에 대하여 불평을 하는 동기생은 아무도 없었다. 5월 말 미군정 당국이 국립대학안에 관한 수정법령을 공포함으로써 반대운동은 가라앉기 시작하였으며, 8월 14일 제적학생 중 3518명에 대한 복적이 허용되어 국대안 반대분규는 1년 만에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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