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훈
고려대의대 정형외과 교수
지난 3월 28일 서울시의사회관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의사회 역사상 최초의 여성 서울시의사회장이 탄생한 것이다. 아마 필자 기억에 의하면 서울시뿐만 아니라 시도의사회 최초가 아닐까 싶다.

여성 대통령의 시대에 사는 현재에 각계의 여성 진출은 이미 화젯거리가 되는 세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 서울시의사회장의 탄생을 매우 경이로운 일로 볼 정도로 의료계는 매우 보수적이다. 아니 보수라고 하기보다는 구태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해석이야 어떻든 간에 분명한 것은 김숙희 서울시의사회장의 탄생은 의료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쓴다는 의미가 있다.

김숙희 신임회장은 참석 대의원 129명 중 무려 67%인 86명의 지지를 받는 기염을 토했는데, 최근에 시행한 모든 의료계 선거에서 이런 모습은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서울시의사회장 선거 역사에서도 최근에는 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3명의 후보가 출마한 경우 예년의 선거를 보면 1차에서 한 분이 과반을 넘지 않아 2차까지 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1차에서 무려 67%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이다. 간접선거가 원래 인맥이 복잡하게 얽히기 마련이고, 매우 보수적인 성향이 드러날 수 있는 선거라고 하는데, 그런 선거에서 압도적이라 할 수 있는 득표수를 보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흔히들 ‘의리’라는 것을 남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의리 빼면 뭐있어?’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과연 남자들이 그럴까? 개인적인 경험에서 말하자면 의리는 있을지 몰라도 신뢰하기는 어렵다. 약속을 잘지키지 않는 것도 남자가 아닐까? 반면 여성들은 비교적 약속에 철저한 편이다. 남자들이야 대부분의 약속을 술자리에서 하고, 술이 깨고 나면 잊어버리지만 여자들은 내뱉은 말은 꼭 지키는 성향이 있다.

김숙희 신임회장은 이력에서도 알수 있듯이 그동안 의료계 내에서 묵묵히 역할을 해 온 분이다. 지역구 의사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서울시의사회 내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왔고, 특히 여자의사회 내에서도 신망이 매우 두터운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이 분이 언젠가는 시도의사회장에 도전할 분이라고 예측할 정도로 소위 말하는 정치적인 사람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외치는 의료계 선거 풍토 속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약속을 지키는 회장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을까?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의 출현을 다들 기대한 것은 아닐까 싶다.지키지도 못할, 지킬 수 있을 만한 입장의 자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료계 선거에서는 대정부 투쟁 구호가 난무하곤 하는데, 현장에서 후보들의 공약을 직접 들어 본 바 김숙희 회장의 경우 잘못된 의료 환경에 대해서는 당연히 가만있지 않겠다는 발언과 함께 여성의 섬세함으로 많은 것을 챙겨보겠다는 말을 했다. 의사회장 선거에서 보기 드문 공약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늘 투쟁이라는 구호 속에 살고 있다. 이번의 서울시의사회장 선거를 보면서‘이제 회원들은 신뢰하기 어려운 투쟁이라는 구호가 아닌 실리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 본다. 그래서 이번 김숙희 서울시의사회장의 출현이 의료계 역사의 매우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신임 회장께서는 이러한 회원들의 기대에 맞게 때로는 대한 의사협회를 견제하고, 때로는 도와가면서 상생할 수 있는 서울시의사회가 되도록 이끌어 주셔야 하고, 무엇보다도 회원의 실리를 챙길 수 있는 회장이 되어 주기를 기대한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이번 선거에서도 드러났듯이 특별분회 소속 회원들의 무관심을 어떻게든 끌어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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