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국
한국제약협회 상무이사

일산에 사는 50대 가장 주홍걸 씨. 그에겐 3남1녀의 자녀가 있다. 모든 자식이 하나같이 착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주길 바라지만 욕심일 뿐이다. 작은 아들은 어쩌다 친구들과 어울려 나쁜 짓을 저질렀다가 소년원에 다녀왔다. 외동딸은 같은 반 친구를 괴롭힌 학교폭력의 주범으로 지목돼 정학 처분을 받았다. 다 자신의 잘못이라 자책도 하고, 아이들의 좀 유별난 성장통이라 여기며 함께 마음수련원도 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웃들과 얘들 학교의 차디찬 시선과 험담은 주홍걸씨 가족을 절망케 한다. 한번 범죄자는 영원한 범죄자라고 낙인찍고, 심지어 주씨 집안은 구제 불능의 문제 집안이니 사회에서 격리시켜야한다고 떠들어댄다. 한때의 비행을 후회하는 두 아이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고자하는 주씨 가족에게 ‘희망의 끈’은 결코 품어서는 안될 헛된 꿈인가?

제약업계와 인연을 맺은지 꼭 5년이 지났다. 그간 제약산업에 대한 다양한 ‘이름짓기’를 마주했다. 제약산업은 이런저런 규제와 제약이 많으니 말 그대로 ‘제약 산업’이고, 언론과 여러 직능단체 등 사회의 다양한 조직 또는 기관과 비교해 가장 힘없는 ‘을중의 을 산업’이라고들 했다. 전세계적인 고령화 추세와 웰-에이징 욕구 확산 등에 힘입어 대한민국의 신성장동력 역할을 선도할 ‘미래 먹거리 산업’이라는 전문가들의 진단도 접했다.

등치된 동의어들 중에 물론 빼놓을 수 없는 게 ‘리베이트 산업’이다. 제약산업에 대한 아무런 기초지식도 없고, 관심도 없던 언론사 정치부장·문화부장들조차 ‘제약산업=리베이트산업’이라고 주저없이 딱지를 붙이곤 했다. 지금 현실이야 어떠하든, 제약산업계의 리베이트 근절 노력이 어떻게 진행되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과거에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라는 낙인이었다.

언론 ‘제약=리베이트산업’ 낙인 억울

밑자락이 길었다. 도입부에 소개한 예화는 국내 제약산업에 대한 리베이트의 주홍글씨를 마주할 때마다 떠올랐던 생각을 비유해본 것이다. 아이들이 많다보면 사고뭉치도 있고, 성장기에 용납하기 힘든 방황을 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그 집안을 총체적인 범죄집단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거듭나려한다면 한껏 격려해주고, 다시 일탈행위를 한다면 엄중하게 처벌하면 될 일이다. 칭찬이든 처벌이든 종국의 지향점은 희망의 싹을 틔우는 것이어야 하며, 그 어떤 예단과 낙인으로도 희망의 싹을 짓밟아서는 안되는 것이 아닌가?

최근 한 종편(종합편성채널) 뉴스 프로그램에서 ‘단독보도’라면서 “제약회사들의 불법 리베이트로 규모가 한해 2조2000억원에 추정되며, 이러한 리베이트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되고 있다” 고 보도했다. “과거 추정의 얘기일 뿐 지금은 말도 안되는 규모”라며 방송측에 거세게 항의했지만,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정부가 2012년 ‘제약업계 리베이트 규모는 전체매출의 20%인 2조2000억원대 추정’을 앞세워 일괄약가인하를 밀어붙인 뒤 제약업계가 이중삼중의 약가인하 조치로 해마다 2조5000억원대의 약가인하 손실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는 의약품의 특성상 필요한 과정인, 의사 등 의약전문가의 의약품관련 강연과 자문에 제약회사가 비용을 지급했다 해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리베이트 딱지를 붙인 최근 사례도 결코 동의할 수가 없다. 사안을 따져 만일 불법 리베이트로 악용된 사례라면 당연히 처벌을 해야겠지만, 덮어놓고 전체 총액을 리베이트 관행의 증좌인양 규정한 것은 억울한 처사다. 제약회사와 의사들이 무슨 불가촉천민도 아닌데 해도 너무한다.

한국제약협회가 지난 7월23일 ‘기업윤리헌장 선포식’을 개최한지 거의 3개월이 지나고 있다. 강도 높은 리베이트 근절 조치를 취하는 회원사들이 속속 늘고 있고, 협회도 표준내규 제시에 이어 회사별 준법경영 자율준수관리자 등을 대상으로 워크숍도 개최하기로 하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그렇지만 별다른 성과없이 과거처럼 또다시 이벤트로,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냐는 불신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윤리경영’ 현명한 감시자 역할 기대

협회와 제약업계는 잘 알고 있다. 리베이트 근절과 윤리경영 정착이 윤리헌장 선포식을 했다고, 하루 이틀에 이뤄질 일은 아니라는 것을. 국민의 신뢰를 얻고, 1000조원대 세계 제약시장에서 당당하게 겨루기 위해서는 윤리경영이야말로 생존의 길이며, 이를 위해 어떤 희생과 대가도 치러야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리베이트의 검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약사를 엄벌에 처하는 것 또한 이견이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사회와 언론, 정부의 시선과 정책이 냉소와 낙인이 아니라 현명한 감시자이자 희망 지킴이로서의 역할을 해준다면 제약업계의 윤리경영은 훨씬 빨리 정착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제약업계만의 몸부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어떤 구조적 문제는 없는지, 만일 있다면 어떻게 바꿔야할지를 따져보고 근원적인 해법을 도출해가는 공론의 과정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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