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갑범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의약평론가회 명예회장

연구중심병원이 선정된 지 1년 반이 넘었다. 그러나 요즘의 분위기를 보면 과연 이 제도가 출발 당시와 같은 기대와 꿈을 그대로 살려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정부는 최근 연구중심병원 1단계사업 2차년도 연구개발(R&D) 지원사업자를 확정 발표하는 등 외견상 제도의 기조에 변함이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어 보이는 대목이 있다.

이런 걱정은 올해 정부가 책정했던 2차년도 예산 규모가 100억 원에 불과해 연구중심병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바 있었는데, 내년도 정부 예산안 중에도 연구중심병원 육성 몫은 145억 원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이 정도 예산 지원으로 연구중심 병원이란 큰 그림을 잘 그려 나갈 수 있을지 하는 마음 때문이다. 특히 금년도에 배정된 100억 원의 예산마저도 이런 저런 사유로 시간을 끌다 마침내 최근에야 10개 병원 중 ‘병원 수요형 과제’ 수행기관으로 3곳만 선정했다는 소식이다.

당초 정부는 올해 연구중심병원 10곳에 각각 10억 원씩 지원할 목적으로 총 100억 원의 예산을 확보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진행과정에서 지원금을 기관별로 차등 배분하는 형식으로 보건복지부가 계획을 변경했고, 이에 기획재정부가 ‘당초 합의 사항과 다르다’ 며 이의를 제기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어 사업자 선정이 늦어졌다는 후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더 알아봐야겠지만 결국 부처 간의 의견 조율이 늦어져 이미 확보된 예산을 전액 집행하기 어렵게 되었고, 사업 기간 또한 그 만큼 늦어진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아직 제도 시행초기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일시적인 차질이나 혼선 정도로 이해 할 수도 있겠지만, 연구중심병원을 놓고 부처 간 이견이 많다거나 범국가적 정책 의지가 모아지지 않아 예산을 적절히 확보해 나가지 못한다면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또 한 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연구중심병원에 선정된 대다수 병원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물론 연구중심병원에 선정된 병원들은 이 제도가 앞으로 ‘가야할 방향’ 이라는데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름 조직과 시스템을 정비하는 등 어려운 여건에서도 연구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은 잘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은 연구중심병원들이 정부시책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일선 연구중심병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정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지원해 주겠다는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병원이 알아서 투자하고, 잘 하는 병원은 평가하여 계속 지원해 주겠다는 식의 제도라면 앞날이 막연하다” 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일선 연구중심병원들의 이런 우려가 있듯이 실제 올해 사업 2차년도 사업자 선정 과정이나 정부의 내년도 예산요구안 등을 살펴보면 과연 정부가 연구 중심병원의 안정적인 로드맵을 가지고 있는지 우려할 부분들이 없지 않다.

다 아는 얘기지만 연구중심병원은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병원들도 자체 연구비(matching fund) 조성 등 연구 인프라를 대폭 확충하여 의료진들이 연구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는 토양을 가꿔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연구를 통한 수익 창출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 힘들다. 가뜩이나 어려운 병원 환경에서 연구중심병원이라고 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투자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처럼 불투명한 상황에서 연구중심병원들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투자에 흔들림 없이 나서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그 역할은 연구중심병원에 대한 보다 안정적인 지원 등 확실한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만 연구중심병원들이 동기를 재인식하고 활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차제에 연구중심병원이 활성화되기 위한 필자의 몇 가지 소견을 피력하면 첫째, 연구중심대학이 연구중심병원을 선도한다는 점을 잘 인식해야 될 것이다. 현행 의과대학은 훌륭한 의학교육으로 유능한 임상 의사를 양성하고, 의학대학원에서는 기초과학과 의학을 접목시켜 융·복합 연구인재를 양성해야 하며, 특히 MD-Ph D제도를 도입하여 우수한 의과학자를 양성해야 바이오신약, 첨단의료기기 및 신의료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연구중심병원들은 하드웨어 중심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의 발전을 지향하여 의료의 틀을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는 병원의 신·증축에 치중하였으나 앞으로는 연구력을 키우고 우수 인재를 양성해야 우리나라도 노벨의학상수상자가 나올 것이다.

셋째, 연구중심병원 간에 협의 기구를 만들어 정부 해당 기관과 긴밀한 소통을 해야 연구중심병원이 활성화 될 것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이제 시작 단계인 연구중심병원을 두고 예단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바심이 드는 것은 우왕좌왕 하는 사이 연구중심병원으로 선정된 병원들이 연구센터 수준의 ‘인증’이나 받는 정도로 역할이 축소되어 좋은 제도가 자칫 용두사미가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장차 대한민국 의료의 패러다임을 바꿔 줄 연구중심병원 제도가 뿌리를 잘 내리도록 정부차원의 구체적인 로드맵의 설정과 실천적인 전략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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